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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x3 Stories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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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페로 Oct 21. 2021

유리의 전말 (1)

유리는 예상보다 크고 건강해 보였다. 그는 376일만에 구조된 토성 유람선의 프리미엄 관람선 16호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존재였다. 젊은 기업가를 태운 펜트하우스 관람선은 오래 전 수명을 다한 무인 탐사선 파편과 충돌했고 토성 고리계로 밀려났다. 구한다고 섣불리 접근했다간 고리를 이루는 무수한 얼음조각에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16호의 경로를 예측하고 예인하기에 가장 안전한 좌표를 계산하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나는 프라이빗한 휴가를 꿈꾸며 비싸게 고독을 구입한 부호에게 닥친 우주적 날벼락에 살짝 고소한 기분을 느꼈다. 몇년치 비축된 항해식은 거의 여물 수준이었을 텐데. 어쨌든 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써야 했다. 


빈사 상태에서 수액을 맞고 가까스로 회복했다던데 반들거리는 눈에서 병자의 고뇌나 무력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유리가 물을 마시길 기다렸다가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까닥이다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높고 새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는  빠르고 또렷하게 말했다.   


[하루를 24시간 주기로 보내지 않은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어. 약은 잘 복용하는지 남편이 메시지를 보냈더라. 참 의례적이지. 답신을 보내면 두 시간 후에나 도착하겠지. 우리 사이에는 4 시간의 거리가 있고 그에게는 그 간격을 채울 것이 많을 거야. 그렇지? 어쩌면 내가 돌아가지 않기를 바랄 수도 있어. 남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오늘도 구조팀에서는 위치 예측률이 많이 상승했으니 조금 더 기다리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더군. 너처럼 말이야.  


조난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처음에는 신났어. 12억 킬로미터 너머에서  유랑하다니 독보적인 경험이잖아. 언제든지 안면을 바꾸는 너구리 같은 인간들보다는 영혼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 멍청한 새와 함께 있는 게 편하거든. 그런 상쾌한 고독은 내가 성인이라는 걸 인식한 이후로 처음 맛본 기분이야. 특히 무중력실에서 퍼즐을 맞출 때 쾌감은 굉장했지.]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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