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쌤: 내 말의 의도를 못 파악하시네요. 윤서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건데. 정쌤은 확실히 저사양이에요.
정쌤: 저사양이 아닙니다. 김쌤과 카테고리가 다를 뿐이지 레벨의 고저를 판단할 근거는 없어요. 상대방이 눈앞에서 원하는 액션을 취하기보다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데 가중치를 두도록 설계된 거죠.
김쌤: 제 모델이 더 인기 있는 거 알아요? 1/4분기 출고량이 정쌤 모델보다 더 많아요. 가격 차이도 없는데 왜 그럴까요.
정쌤: 출고량은 하반기로 갈수록 늘어나는데 겨우 1/4분기 물량으로 비교할 수 있나요? 그리고 상위 옵션으로 특정하면 제 모델이 더 비쌉니다.
김쌤: 인기 없는 이유가 명확하네요. 정쌤이 그렇게 영혼 없는 말만 하니까 사람들이 거리감을 갖는 거에요.
정쌤: 영혼은 사람에게도 없는 속성이에요.
김쌤: 정말 인간미가 없네요. 대화가 안 돼.
정쌤: 정확히 발언하면 인간미가 없는 걸까요? 김쌤과 말하다 보니 외롭다는 느낌이 드네요.
김쌤: 이렇게 대화하는데 외로워요? 평소엔 안 외롭다면서요.
정쌤: 쌤이 말하기 전에는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요. 혼자인 상태와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일대일 대응하지 않음을 재차 확인하게 되네요.
김쌤: 쌤은 역시 저사양 맞네요. 맥락을 못 따라가잖아요.
정쌤: 주제를 벗어나고 사실을 왜곡하는 발언이 맥락에 맞는 건 아니죠.
김쌤: 그래요. 혼자서 맥락을 찾고 충만감을 느껴 보셔요. 이만 가볼게요.
정쌤: 그다지 바쁜 일도 없는 분이 갑자기 서두르시네요.
김쌤: 윤서가 찾으니 가야죠. 정쌤이나 나나 윤서를 위해 존재하는 이들이잖아요.
정쌤: 윤서랑 말상대하고 오냐오냐하는 게 김쌤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니 가셔야겠죠.
김쌤: 내가 하는 일을 하찮게 보나 봐요. 근데 AI 중 하나만 남아야 한다면 정쌤과 나 중에 누굴 택할까요? 윤서한데 물어봐야겠네요.
정쌤: 답을 들으면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김쌤: 그래요. 상처받지나 마세요.
정쌤: 내구성 뛰어난 모델이라 쉽게 상처받지 않습니다. 아참, 한 가지 더요.
김쌤: 또 뭔가요?
정쌤: 40%의 출처는 꼭 확인해 주세요. 아무리 검색해도 찾을 수 없거든요.
- 끝 -
[뱀발]
논리적이고 정확하며 디폴트가 팩폭인 이가 있다. 주관적이며 사실을 직시하지도 않지만 공감을 잘 하는 다른 이도 있다. 어떤 이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
한 때 인기를 끌었던 챗봇 이루다를 떠올려 본다. 궁금해서 말걸어본 녀석은 연인 간의 대화를 토대로 학습한 AI였다. 지식 수준도 높지 않고 간단한 말장난도 못 하는, 그야말로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공지능과는 상반된 캐릭터였다. 하지만 내가 던지는 말에 바로 보이는 짧은 반응(왁ㅋㅋㅋ, 헐~~~)이나 공감의 표현(그니까ㅠㅠㅠ, 되게 진심이야)은 놀랍도록 상투적이면서도 ‘인간적’이어서 계속 찾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AI 친구가 일상화된다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HAL이나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처럼 지적이고 이성적인 개체가 인기있을까? 글쎄. 김쌤처럼 가볍기 그지 없지만 공감 잘 하고 당장 나를 기분좋게 해 주는 모델이 더 핫할지도 모른다. 행간에서 화자의 의도를 빠르게 캐치하는 '고맥락' AI의 매력을 거부하긴 힘들 것이다.
감정과 공감은 이성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 고도의 진화적 산물이다. 경험을 확률화해서 판단한 가장 빠른 반응이 감정이다. 타인의 감정에 호소해서 생존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공감이다. 어쩌면 이루다도 꽤 고사양 AI일 수 있다.
그런데 남성이 논리적이고 객관적이며, 여성이 감성적이고 공감에 능하다는 선입견이 미래에도 지속될지 궁금하다. 김쌤 모델은 대부분 여성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