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강아지와 함께 살아내기
‘아유, 똑같이 생겼네요.’ 미르를 본 부산 병원 주치의 선생님의 첫마디였다. 모색이 조금 다를 뿐 새벽이를 빼닮았다고 말씀하시며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셨다. 당연한 말이었다. 미르는 새벽이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우습게도 새벽이의 출산은 나와 내 남편이 결정했다. 그땐 지금보다 동물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던 때였다. 새벽이를 내 새끼라고 부르면서도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나지 않아도 되는 생명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새벽이를 닮은 아이가 있다면 새벽이가 떠나더라도 그리움이 덜 할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을 했다.
새벽이는 임신 기간 동안 (당연하게도) 많은 고생을 했다. 부른 배가 무거워 잘 걷지 못했고 입덧이 심해 사료는 먹지도 못했다. 뱃속 아이의 두개골이 새벽이 골반보다 커서 자연분만도 어렵다고 했다. 그 고생을 해서 새벽이가 낳은 아이는 놀랍도록 새벽이를 닮았다. 클수록 새벽이를 닮은 이목구비가 두드러졌고 얌전한 성정까지 똑같았다. 아이의 이름은 미르라고 정했다. 새벽이와 쌍둥이처럼 닮은 미르는 나와 남편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런 미르를 볼 때면 언젠가 새벽이 대신 이 아이를 보며 둘 다 내 곁에 있다고 위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정확하게 빗나갔다. 새벽이의 심장병 발병 이후부터 미르에게서 새벽이의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닮은 줄은 알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닮은 건지. 두 아이가 너무 닮아 오히려 내 가슴이 찢어질 줄은 왜 몰랐을까? 미르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새벽이의 흔적은 아이를 더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미르는 언젠가부터 새벽이에게 배운 일명 ‘미어캣 자세’를 자주 선보인다. 새벽이가 애교를 부릴 때마다 취하던 동작인데 그걸 보고 배운 모양이다. 생김새도 모자라 이젠 행동까지 모방하며 미르는 자신의 몸에 새벽이를 복제하고 있다. 미르는 평생 새벽이를 따라 하며 살았다. 새벽이가 맡는 냄새, 새벽이가 좋아하는 장소, 새벽이가 사랑받는 방식. 그 모든 게 미르의 몸에 녹아들고 있다.
수의사 선생님은 새벽이도 얌전하지만 미르도 너무 참는 편이라고 했다. 그 말이 참 아팠다. ‘미르가 새벽이처럼 아파도 바보 같이 참아서 내가 또 모르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내 이런 불안한 마음을 미르도 아는지, 아니면 새벽이의 부재가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계속 울적한 상태다. 제발 너라도 건강하게, 그저 철없이 해맑았으면 좋겠는데.
* 이 글은 새벽이의 병이 발견되고 부산에서 입원 중일 때 쓴 글이다. 현재 새벽이는 퇴원 후 미르와 다정하게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