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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배 Jun 20. 2023

싫은 사람과 밥을 먹는다는 것은

뜻밖의 재미.

"오늘 시간 돼요?"


큰일이다.


내가 베풀었던 작은 호의에 고마워하며 밥 한 번 먹자고 그동안 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을 눈치코치 채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내가 베푼 것은 그저 인간애에서 나오는 작은 호의였을 뿐, 그 사람에 대한 호감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어서 밥까지 함께 먹어가며 담소를 나누고 싶진 않았고 실제로 바쁜 일정과 적당히 둘러댄 핑계들로 이리저리 빠져나갔었는데...

오늘은 오갈 곳 없이 딱 막혀 버렸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한다기보다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에만 집중하는 사람.

나를 낮추기보다 나를 높이려고만 드는, 어떤 일이든 본인의 생각이 먼저인 사람.

사람들의 모임에서 임원을 맡고 있다는 책임감이 자만심으로 변질되어 다른 사람을 가볍게 보는 사람.


내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어느 카테고리에 속해 있던 그분의 제안을 이번엔 거절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잘 거절하지 못하는 이 지긋지긋한 소심증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국밥을 사주신다니 그저 맛있게 한 뚝배기 하고 가자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주문하고, 기다리고, 음식이 나오면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이야기.

오며 가며 핑퐁처럼 주고받는 게 아니라 한쪽으로만 쏟아지는 이야기.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자기 이야기.

후추처럼 자비 없이 쏟아지는 그분의 이야기를 국밥에 한 번에 말아서 후루룩 먹어버렸다.

나랑 밥 먹자면서, 내 이야기는 들어줄 생각이 없는 것인가. 살짝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차피 즐기기로 했으니 본격적으로 들어주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의 적극적인 호응이 이어지자, 쏟아내는 그분의 이야기에 스피드가 더해졌다. (국밥은 대체 언제 드시려고...) 밥을 먹는 잠깐의 몇십 분간 그분의 가족관계는 물론이거니와 가족사와 라이프스타일, 그분의 꿈과 희망까지도 알아버렸다. 내가 평생 몰라도 하등 무해할 이야기들이 엄청난 속도로 내 주변에 쌓여갔다.


그리고 보았다.

그분의 엄청나게 신이 난 얼굴을.


내가 그분을 싫어하는 이유들은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여 함께하는 모임에서도 그분을 알게 모르게 어려워했고, 그분도 어느 틈엔가 자신을 향해서 달라지는 공기를 느끼시는 듯했다. 그럼에도 책임감은 있으신 분이라 맡은 역할에 충실하려 하지만 그것이 또 모두의 의견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아 모임에서 보는 그분의 얼굴은 언제나 미간에 개울물 하나는 흐를 것 같은 주름이 자리 잡은 인상 쓴 얼굴이었다.


런데 그 얼굴에 인상이 사라지고 눈을 빛내며 신나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색다른 모습이었다.

웬만한 친분이 아니면 내 이야기는 잘하지 않으려 하고, 먼저 대화를 시작하기보다 듣는 쪽을 더 좋아하는(소심증) 나와는 완벽히 반대되는 결의 사람이었다.


아, 그러셨구나. 아이고, 힘드셨겠어요.

라는 구태의연한 반응에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시는 그분의, 이제는 희미해진 미간의 주름자국을 보니 귀여운 마음까지 들어 살짝 웃음이 났다.


그분은 그저 자기 얘기를 쏟아내고 싶었고,

마침 그 자리에 내가 그 이야기를 받아냈던 것이다.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 중 누군가에게도 나는 이상하고 별나고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것이 비상식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비운 국밥 뚝배기와

못지않게 개운하게 맑아진 그분의 얼굴과

비록 한귀로도 듣지 않고 흘려버렸지만 그분의 색다른 면을 발견한 것이 재미있었던 나는,

맛있는 한 번의 밥 먹기를 완료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 있던,

그랬기에 내가 싫어했던 그분의 다른 모습을 발견한 후로 그분의 좋은 면만 알게 되어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까지 간다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해피엔딩이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아직도 그분의 모든 면을 이해하고 좋아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언젠가 또 밥을 함께 먹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이리저리 도망 다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번엔

또 정신없이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한 번에 휘휘 비벼먹을 수 있는

비빔국수 정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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