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없는 것을 볼 수는 없다.
스팸 전화 아니면 알람 소리 둘 중 하나일 확률이
99%인 내 전화기가 울렸다.
"아!, 씨이~귀찮아" 달리던 자전거 브레이크를 밟고 번호를 본다. 연신 가래 끓는 기침이 가슴팍을 울리며 터져 나오는 이 지랄 같은 상황에 울린 전화 벨소리.
"에이씨, 스팸이구만"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으려다 오른쪽 귀에 전화기를 붙였다. "여보세요"
"누나, 나야"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남동생이 태연한 목소리로 날 부른다.
오랫동안 원수처럼 지내다 간신히 화해의 물꼬를 트고 지내는 나의 귀한 남동생이다.
이발소를 하는 동생은 가게에 있을 때면 무제한 음성통화가 가능한 직원의 폰을 빌려 전화를 할 때가 종종 있다.
동생 폰은 알뜰폰 요금제 중에서도 음성통화 지원 시간이 길지 않은 모양이다.
이럴 때 보면 유들유들한 동생의 성격이 더 좋아 보인다. 실리적으로 사는 듯이 보이는 동생에게는 배울 점이 넘친다.
"누나, 아버지가 밥상에 있는 수저도 안 보이신대, 그래서 엄마가 식사 도와주셨다더라. 엄마가 당장 병원 가자해도 안 가신다고 내일 가는 날이라고
낼 가신다고 버팅기고 계신데"
아버지께선 지난 4일과 6일 두 번에 걸쳐 백내장 수술을 마치신터였다.
아!!....
"그래" 여차저차 다른 얘기를 좀 더 하다 끊고, 엄마에게 전활 했다.
"엄마, 아버지 눈이 안 보이시면 당장 병원 가셔야지. 눈은 순식간에도 나빠질 수 있어. 그러다 더 안 보이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
엄마 : 안 간다는데 그럼 어떡하냐? 소 같으면
끌고나 가지.
나 : 엄마, 아버지 좀 바꿔 주세요.
잠깐 사이 받네. 안 받네. 실랑이가 벌어지는 듯하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아버지 : 왜?, 왜 자꾸 전화질이야?
나 : 아버지, 아버지는 혈압에 당뇨까지 있으시잖아요. 지금 눈이 안 보이시는데,
병원 안 가시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러지 말고 잠깐 숨 좀 돌렸다 택시 불러서 병원 다녀오세요. 네. 제발요. 걱정돼서 그래요. 제발 다녀 오세요. 아버지 무서워서 그러시는 거예요?
아버지 : 안 간다면 안가. 내일 가는 날이니까 내일
가면 돼.
아! 썅~~.
목에선 계속 가래가 끓어오르고, 기침이 터져 나온다. 옆구리께 가슴뼈가 울리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
이해해 보려 했지만, 나로서는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이해하기 싫다.
이 지랄 맞은 상황에 내 정신은 이미 혼미해졌다.
아버지 심정은 뭘까?
두려운 거라면 당장 병원을 가도 열두 번도 더 갔을 텐데, 그건 아닌 것 같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삶의 끈을 놓아 버리려는 걸까?
아니면 이런저런 자신의 상태가 못마땅해서 모든 걸 다 외면하고 싶은 걸까?.
자신의 존재 자체가 버거운 걸까?, 그냥 지금의 자신이 싫은 걸까?
"아 몰라 몰라~~ 다 내 생각이지. 내 생각 따위 집어치워."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일 뿐이야.
아버지는 아버지의 생각이 있다고 멍청아" 이런 생각을 끝으로 멈출 듯 멈추지 않는 기침 탓을 하며,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이비인후과 의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국에서 약을 타고, 점심을 먹으러 단골 충무 김밥집에 들렀다.
언제나처럼 알아서 참기름장까지 만들어 갖다 주시는 주인아주머니의 배려와 마음 씀씀이가 이제는 고맙기보단 당연하게 느껴진다. 알아서 챙겨 주시지 않으면 짜증이 나기까지 한다.
원래는 기름장을 주지 않지만, 하도 여러 번 기름장을 부탁하니 그냥 알아서 가져다주시는 건데, 난 참 못돼 먹은 년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따라 김밥이 짜다. 소금을 많이 묻히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짜지? 미각도 신경에 영향을 받는 건가?
순간 내 손이 전화기 버튼을 누르고 있다.
다시 엄마에게 전활 건다. 안 받으신다. 이번에는 아빠에게 건다. 안 받으신다. 계속 번갈아 걸었지만, 안 받으신다.
머릿속에서 두 분이 티격태격하시는 장면이 떠올라 가만있을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어릴 적 목격한 수 없이 많은 밥상머리 전쟁이 떠올라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
칼부림 난 건가?
엄마 : 병원 가야지. 대체 어쩌려고 그래...
아빠 : 안 간다니까. 왜 자꾸 지랄이야. 지랄이.
이쯤까지 생각이 흐르고 나니 더는 안 되겠다 싶다. 늘쌍 주먹이 날아오고 엄마에게 폭력을 휘두르시는 아빠의 모습이 익숙하다 보니, 불길한 예감이 들어 가만있을 수가 없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아빠가 백내장 수술을 받았던 민들레 안과 원장님이 전활 주셨다.
아까 전 아버지 상태를 알리고, 아버지가 오늘 진료를 거부하는 중인데, 어떻게 오늘 바로 진료하지 않아도 괜찮겠냐? 아니면 당장 가야 하나? 묻기 위해 전화했었던 민들레 안과 병원이었다. 병원 원장님이 당장 병원으로 와야 한다며 전화를 걸어오신 거다.
두 분 부모님 모두 집 전화며, 휴대폰까지 안 받는 상황. 할 수 없이 면사무소로 전활 걸어 자초지종을 말하고, 우리 동네 이장님 전화번호를 여쭸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동네 이장님께서 직접 동네를 뒤져 부모님을 찾아냈고, 다급하니 병원 가시라고 전달까지 해주셨다.
그 시간 부모님은 태평하게도 동네 경로당에 계셨다고 했다. 어차피 병원은 안 가기로 제쳐두고 말이다. 눈이 안 보이는 마당에 경로당이라니... 참나... 콧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쉰다는 말이 생각났다. 불안해서 사람 많은 곳을 찾아가신 건가? 불안을 느끼기 싫어서......
"아 몰라 몰라. 알고 싶지도 않아. 제발 좀 현실에선 현실감을 갖고 살아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까지 올라온다.
그런 아버지께 다시 병원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다고 재차 강조했다. 혈압이 있는 경우, 이런 상태가 되면 순식간에 눈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고 하니 어서 오시란다고 최대한 천천히 간곡히 전달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절대 가지 않겠다고 못 박으셨다. 애가 타서 이장님께 다시 전활 걸어 제 말은 안 들으시니, 이장님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다시 꼭 병원 가도록 설득해 달라 부탁드렸지만, 결국에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선 엄마에게 잔뜩 성질만 부리시고, 욕지거리와 짜증을 내뱉는 걸로 마무리를 하신 모양이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고, 무서웠다. 나이 일흔여섯에 눈이 안 보이게 되신다면 원래부터 안 보이던 것과는 다른 절망을 만나게 될 텐데, 얼마나 두려울까? 사실 내 마음속에선 아버지 얘기가 아니라, 그게 나라면 얼마나 무서울까? 싶어 내가 더 난리를 쳤다는 걸 뒤늦게 한바탕 난리를 친 후에야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왜? 왜? 이렇게 아버지 일을 내 일인 것처럼 불안해하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내 안에 불안이 커서 그런 걸까?
단지 아버지가 너무 불쌍해지는 걸 보기 힘들어서라는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가슴이 답답하다.
이 글을 쓰는 사이 동네 이장님께 전화가 왔다.
아버지께서 첫차로 병원 가신다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전해 주시려고 일부러 전화하셨다는 이장님께 제차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면서도 왠지 아버지 딸이라는 게 부끄러웠다.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고 싶은 나.
인정하든 안 하든 지금의 아버지가 나의 부모임은 이미 결정된 건데, 아버지의 습성을 많이 대물림받았다는 게 몸서리치게 싫다.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인데, 아직은 벗어던질 힘이 부족하다. 그러기도 하고 현실적으론
어쩌면 아버지 상황이 악화됨으로 인해 어머니마저 힘들어지시게 되고, 그 경제적. 정신적 부담을 떠안는 게 걱정이 됐던 것도 같다. 이제야 뒤늦게 부모님과 엉킨 감정을 풀어보려는 찰나에 모든 게 뒤죽박죽 혼란으로 빠져들까 봐서 이런 상황들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형제들 중 유독 부모님 일에 집착을 보이는 나. 이쯤 되고 보니 이건 부모님의 문제라기보단 어디까지나 내 문제라는 게 더 명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