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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 권분자

산문

by 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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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권분자


어릴 때부터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폭우를 좋아했다. 굵은 빗줄기, 커다란 천둥소리, 번쩍이는 번개는 분명 원초적인 두려움을 안겨주었지만, 그 뒤에는 갈증을 해소하는 즐거움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농번기에 농사일로 바쁘셨던 부모님이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면 쫓기듯 논밭에서 집으로 달려왔다. 특히 어머니는 폭우를 피해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은 뒤 비로소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셨다. 부모님 사랑에 목말랐던 시골아이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단란함이었다. 폭우가 오는 날이어야만, 모처럼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고, 그때 어머니는 감자를 찌거나 전을 부쳐주셨다.

따뜻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나는, 그 감동을 기록하고자 이웃 여자와 함께 팔공산의 전원주택으로 향했다. 폭우를 영상으로 담아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택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방수 케이스에 넣고 삼각대와 함께 마당에 설치했다. 프레임은 허공과 나무들이 찍히도록 조절했다. 천둥번개가 나무를 비추면 으스스한 분위기가 극대화될 것 같았다. 나와 이웃 여자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와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에 취했다. 천둥이 창틀을 흔들었다.

“취미가 뭐이래.”

“기다려봐. 다 찍고 맛있는 야식 해줄게”

나는 투덜거리는 이웃 여자를 달랬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세차게 내리쳤다. 번개의 엄청난 빛이 마당을 순식간에 환하게 밝혔다가 사라졌다. 일렁이는 나무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는 영상이 제대로 찍히기를 한 시간쯤 기다렸다. 그리고는 기대감에 이웃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혼자 나가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빨리 바깥으로 나가 삼각대와 휴대폰을 챙겼다. 옷이 순식간에 젖어버렸고, 우리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컴퓨터에 휴대폰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 몇 분은 시커먼 어둠과 빗소리, 천둥소리뿐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 번개가 번쩍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마당 뒤쪽이 선명하게 보였고, 그곳에서 무언가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급히 영상을 멈췄다. 그곳에는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는, 축축한 머리와 짝 달라붙은 옷을 입은 사람의 형체가 또렷이 보였다.

“누구지? 분명 밖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울타리로 둘러진 마당에 낯선 사람이 들어올 수 없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나무와 텃밭이 전부였다. 눈을 비비고 다시 자세히 살폈다. 할머니였다. 이 마을에 할머니라면, 뒷집 할머니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분은 아니었다.

나는 급히 마당에 불을 켜고 빗줄기 사이를 살폈다. 역시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컴퓨터로 돌아와 영상을 살폈다.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할머니는 마당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어!”
아주 짧은 순간 할머니의 얼굴이 비춰졌다. 흰 머리카락에 검게 그을린, 주름진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곧 마당에 어둠이 드리우며 영상이 끝났다.

지금 내가 본 것이 무엇일까? 내 눈의 착각일까? 그러나 증거가 있었고, 나와 이웃 여자의 눈이 동시에 이상할 리도 없었다. 꺼진 화면을 다시 켰다. 영상을 골똘히 바라보던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감자를 삶고 부추 전을 부쳤다.

“엄마 보고 싶었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웃 여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울고 있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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