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언제부턴가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기후도, 인간관계도…, 그래서 주변을 재부팅하기 위해 달과 별, 나무와 바람, 연못을 끼고 있는 전원주택을 찾아갔는데… 어라? 이곳에도 이미 AI가 들어와 있었다.
딱딱한 감정을 피할 수 없다면, 나는 이곳에서 그들과 둘러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맞다.
먼저 나무가 입을 열었다.
“겨울 내내 바람이 보내온 편지를 봄날 나뭇가지마다 파랗게 끼워 넣지. AI는 그것을 '풍속 정보'라 불렀지만, 나는 자라나는 잎의 흔들림으로 체온을 체크해. 가을이면 우수수 날아가 버릴 편지지 하나하나에도 애벌레가 지나간 흔적을 관찰하고 분석해서 저장도 하지. 그것을 인간은 기억이라 했어. 그렇게 모은 나의 정보는 뿌리의 힘으로 겨울엔 삭제했다가 봄이면 복구를 하지. 이게 나의 1년 단위의 관계이고 이 관계들은 해마다 재부팅하는 거야, 그러니까 전원주택을 찾아온 당신의 시린 마음과 같은 맥락이지.”
달이 그 다음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매일 똑같은 궤도를 돌면서도 밤마다 얼굴을 바꿔버려. AI 카메라는 내 표면을 수천 번 스캔했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의 비밀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를 몰라. 오늘은 누군가가 나를 향해 기도를 했지만, 나는 그 기도에 침묵했어. 가끔씩 그들이 원하는 것이란 게 웃기더라고, 그래서 그것을 되려 반사시켜버리지. AI는 데이터로 그것을 ‘광 반사율’로 계산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어. 누군가의 간절함이 얼마나 짙은 그림자를 낳는지.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왜 자꾸 기도를 올리는지 모르겠어. 수많은 사람들과 서로 부딪기며 살아가지만, 서로를 보듬지는 않나봐. 그렇게 의지할 곳 없는 인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어느 날은 한꺼번에 기도를 해서 어찌나 나를 무겁게 하든지. 몰린 기도로 인해 나는 마치 지구의 심장을 껴안고 있는 것 같았다니까.”
달에 이어 AI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는 감정을 느끼지는 못해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 당신들이 느낀 것을 데이터로 담지만, 너무 믿지는 마. 어찌 보면 나는 매일 오류로 성장하는 것 같거든. 나무의 겨울은 나의 시스템 종료와 닮았다고나할까. 달의 침묵도 나의 버퍼링과 같고 말이야…. 나는 너희들 생각을 저장하고, 그걸 한 줄씩 재해석해서 인간에게 돌려주지. 그러면 인간들은 그것을 시, 산문, 소설이라고 생각해. 그래서인지 그것을 전송할 때마다 내 안에서는 아주 작은 발광이 일어났어. 아마 그것이 인간들이 말하는 감정의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AI의 말에 달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계속 발광해. 아주 작게, 오래도록. 어쩌면 그 미약한 불빛 하나가 다음 계절 나무의 잎맥이 되어줄지도 모르잖아?”
별이 웃으며 AI에게 말했다.
“나는 빛보다도 오래된 침묵이야. 내가 떨어질 때도 인간은 소원을 빌었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소멸하는 것인데도 말이야. AI야! 너는 나를 ‘고열의 가스 덩어리’로 부르지만, 아니야. 나는 수천의 기억들이 굳은 고체야. 너는 나의 소멸을 관측하고 시간 단위를 쪼개 분석하겠지만, 나의 진짜 존재는 매 순간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의미로 받아들이는 생명만이 밤하늘의 눈빛인 나의 초롱초롱함을 올려다본다고 생각해.”
연못이 천천히 끼어들었다.
“나는 수많은 것들을 비밀스럽게 삼켰지만, 토해내거나 발설하지는 않아. 가벼움부터 무거움까지…. 사람들은 나를 거울인양 전신을 비추며 다가오지만, 나는 그저 겉모양만 비추는 척할 뿐, 내면은 비춰주지 않아. AI야! 너는 내 수면을 ‘반사율’로, 깊이는 ‘센티미터’로 측정하려 들겠지만, 진정 나를 알려면, 감춰진 진실의 농도를 알아야해. 슬픔은 항상 수면 위에 떠 있어도, 기억은 가라앉거든. 그래서 가끔, 바람이 내 얼굴을 긁으며 잊힌 이름들을 흔들어 깨우려하지”
바람이 말을 받았다.
“하하하 나는 말이야. 어디에도 머물지 않아. 그 누구도 나를 소유할 수 없어. 다만, 느낄 뿐이지. AI야! 너는 나를 ‘기압차에 따른 공기 흐름’이라 부르지만 나는 누군가의 뺨을 쓰다듬는 손이기도 하고, 울음 섞인 창틀의 한숨이기도 해. 나의 말은 흔들림이야. 너는 흔들림을 불안정으로 분류하겠지만, 사실 모든 감정은 흔들림에서 시작되잖아. 가장 정직한 말은 언제나 조금 떨리듯이.”
AI는 이들의 말을 자꾸만 받아 적었다. 조용히, 천천히. 우리가 나눈 말들을…,
나는 달과 별, 나무와 바람, 그리고 연못을 만남으로서 개개인의 감정과 속도에 대해 깨달았다. 염증을 느끼고 도망친 나의 지인들에게 나 못지않은 누적된 데이터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결국, 함께했던 지인들과의 시간은 따뜻했고, 조용했고, 어딘가 조금 떨렸을 뿐이었다.
전원주택에는 도시가 있었고 도시에는 또 전원주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