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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에게 한 수 배우다 / 권분자

산문

by 권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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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에게 한 수 배우다


권분자



담벼락에 휘갈겨 놓은 낙서가 발단이었다. 휘갈겨진 낙서는 문장이라기보다는 외마디처럼 느껴졌다. ‘가지 마. 나는 잊지 않을 거야’ 글자는 굵고 삐뚤삐뚤했다. 마치 담벼락에 얼어붙은 굵은 담쟁이 줄기 같았다. 담쟁이 줄기가 바들바들 떨면서 추위를 참고 있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글씨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모두들 무심코 지나가기엔 어딘가 이상한 기운이라도 감도는지 몸을 오그렸다. 크고 선명해서 마음에 담고 있는 말 같았다. 도대체 누가 쓴 거지? 누군가에게는 그 말이 경고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부탁일 수도 있는 낙서를 나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낙서의 주인은 누구일까. 그는 누구를 붙잡고 싶었던 걸까. 혹은 붙잡히고 싶었던 사람에게 잊지 말아달라는 말이었을까? 낙서를 바라보는 나로서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뒷모습이거나, 곧 떠날 사람이 쓴 것 같았다.

담벼락 위로 눈송이가 하나 둘 내려앉았다. 낙서 위에도 눈이 스치듯 쌓였다. 마치 그 말을 감추어버리듯이…, 나는 어느 날부터 담벼락을 무심코 지나치지 못했다. 겨울 내내 그 앞을 지나가며 낙서를 확인했다. 그러다 문득, 그 문장은 나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짧은 낙서는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임에는 틀림없었는데, 사랑을, 약속을, 또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이 낙서를 발견하는 순간부터 나는 왜 이토록 골똘해지는 걸까.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훅, 올라왔다. 어쩌면 이 말은 나에게도 필요한 문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인지, 누구를 사랑하며, 무엇을 잡고 있으며, 누구를 기다리는지…,

겨울은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 했다. 기억을 하얗게 만들고, 마음을 둔하게 만들었지만, 그럴수록 누군가는 담벼락에 말을 새겼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긴 겨울을 뚫고 전해지는 무언의 목소리였다. 꺼지지 않으려는 불씨, 외롭고도 절실한 마음들, 낙서를 휘갈긴 자와 낙서에 얽매인 나는 서로를 모른 채 스쳤을 인연이지만, 그의 외마디가 나에게 이렇게 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이번 겨울은 보이지 않는 자로 인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끈질겼던 나의 생각을 멈추게 한 건 담쟁이였다.

봄부터 담쟁이넝쿨이 누군가의 외마다와 그로 인한 나의 생각을 덮어갔다. 세상은 그리 골똘하지 않다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지우는 것이라고, 담벼락에 또박또박 써가며 담쟁이는 아둔한 나를 끈질기게 가르쳤다.

겨울이 까발린 것을 봄이 덮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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