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제안
**경찰서 가는 길**
“저는 여기서 터전을 이미 일궈 놨잖아요. 여기서 절 믿고 따르는 식구들이 상당수인데, 제가 어찌 감히 여길 벗어날 생각을 하겠습니까? 전 이곳 생활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 뭐··· 식당이 워낙 잘되시니까요.”
“하하,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하. 아무튼,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네네, 그럼요. 편하게 물으셔도 됩니다.”
“혹시 며칠 전에 저를 왜 쫓아오셨던 겁니까?”
예상치 못했던 직접적인 질문에 당황한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장과 눈이 마주쳤고, 서로 아무 말 없이 흐르는 정적을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
“아··· 그걸 어떻게···.?”
“장사만 수십 년이에요. 음식 장사는 손도 중요하지만, 눈과 귀도 중하거든요.”
난처한 상황이다. 왜 이 배신자를 쉽게 이겨 먹을 거라 확신했던가··· 눈과 귀가 발달한 놈이란 걸 그날도 모르지 않았는데··· 까딱하면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아니다. 지금은 경찰서에 가는 길이니 괜찮을 거야. 아··· 맞다··· 이놈은 경찰과 한편이구나. 집중하자··· 별일 아닌 것처럼 넘겨야 한다...
“저··· 실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음··· 좀 민망한데요···. 음...”
“뭔데 그리 뜸을 들일까요? 더 궁금해지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좋아합니다!”
“네?? 저를요??”
사장은 그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봤다. 50년 넘게 살며 이런저런 사람을 많이 봤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저 여자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아,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아, 예진이를?”
“네, 맞습니다. 그날 점심쯤 사장님을 뵈러 간다고 해서 제가 태워 드렸는데, 그날 그 밝은 미소에 그만...”
“아··· 예쁜 아이지요. 어떻게 소개를 해 드릴까요?”
당황한 나머지 거짓 고백을 한 형원은 너무 민망해서 뒤로 돌아 인력거를 다시 끌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지고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가 봐도 그가 사랑에 빠졌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 아닙니다. 저 같은 게 감히 어딜···.. 아무튼 그날 어찌해 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결혼은 했는지···.. 뭐··· 근데 사장님과 같이 가더니··· 또 같이 들어가서 오랫동안 안 나오시길래, 괜한 오해가 들어 혹시나 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괜한 오해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음···. 청년이 어때서 그래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입니다. 진실함이 중요한 거죠. 내 응원하리다.”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 근데 그 집에 들어가서는 뭘 하셨길래 그리 오래 계셨던 건가요?”
사장은 방심하다가 훅 들어온 질문이 달갑지 않았다.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 경찰서가 근처에 보였다.
“음······ 아. 마침 경찰서가 보이네요. 이만 내려줘요. 여기서부터는 내가 걸어가리다. 더운데 고생 많았소.”
“아···. 질문에 답을 안 주시고···”
사장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빠르게 내려와 찻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가다 말고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는 형원 쪽으로 다시 돌아와 돈을 쥐어주며 한마디를 건넸다.
“이건 내 말 벗을 해 준 삯. 뭔지는 모르겠지만, 날 의심하지 말아 줘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경찰서 앞 찻집**
일본 전통 느낌의 내부 구조와 그에 걸맞은 소품들이 배치된 이 찻집은 예쁘고 어린 중국 여성들이 기모노를 입고 각 테이블마다 차를 내려주고 있었다. 말끔히 차려입은 중년 일본 남성들이 혼자 혹은 둘이서 그녀들이 내려주는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사장은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옷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살짝 불편했다. 그가 들어오는 걸 보자마자 츠즈키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서자 츠즈키는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일찍 오셨군요, 이 선생님. 먼 길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서장님은 혹시?”
“서장님은 나오시다가 급한 일이 생겨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사장은 츠즈키의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서장은 자신이 거절하지 못하도록 쳐 놓은 수단일 뿐이란 걸 애초부터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 그럼 다음에 다시 올까요?”
“아닙니다. 서장님께 내용은 대략 전달받았습니다.”
그렇게 둘은 악수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여느 자리처럼 여직원이 차를 들고 왔다.
“여기 두고 가게. 내가 직접 하겠네.”
츠즈키는 능숙하게 가지런히 다구를 정돈하고, 숙우와 다관, 그리고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십여 초 후에 물을 버리고, 다관에 찻잎을 가지런히 담고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부은 뒤, 얼마 후 또다시 이를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물을 붓고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며 말을 건넸다.
“혹시 선생님께서는 다도를 좋아하시는지요?”
“바쁘게 살다 보니 성미가 급해 취미를 붙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은 처음인데, 행색이 이런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에이, 무슨 말씀을요. 차림새가 중한가요? 마음이 중하지요.”
차가 우러났는지 츠즈키는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르 흘러내리는 소리와 깊은 향이 꽤 인상적이었다. 왜 사람들이 다도를 취미로 삼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저도 실은 이곳에 와서야 다도를 취미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됐지요."
"뭐든 취미를 갖는 건 참 좋은 일이죠."
"하는 일이 아무래도 적이 많다 보니, 저녁에 일을 마치고 술 한잔하기도 불안합니다. 겁이 많아서 집에만 있었는데, 늦은 시간에 축음기 듣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더군요. 책 읽는 것도 싫어 경찰이 된 놈이라, 책을 읽는 취미는 애초에 없었고요. 그러다가 우연히 다도를 접하게 됐는데, 이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더군요."
"아... 참 좋은 취미네요."
사장은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경감의 신세 한탄을 들으러 여기까지 온 건가?' 차를 마시며 딱히 할 일이 없어 홀짝이니, 금세 잔이 비었다. 츠즈키는 다시 찻잎이 담긴 다관에 물을 따랐다.
"그렇죠. 그리고... 실은 말입니다."
츠즈키는 다시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집에서도 누군가 총을 들고 찾아오진 않을까, 자다가 날 찌르지는 않을까... 매일이 두려움의 연속이었고, 악몽도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면서부터 그런 불안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참 다행이네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때, 츠즈키는 아까 우려낸 차를 다시 빈 잔에 채웠다.
"참 재미있죠? 근본적인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마음을 차분히 해주는 무언가를 한다는 이유로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겁니다. 제 일이 달라졌거나, 적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빙빙 돌리는 거지? 본론부터 말해라, 좀.' 하지만 섣불리 말하지 않고 참고 있었다. 이제는 맞장구쳐 줄 말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감탄하는 척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 우려낸 뒤 두 번째로 우린 차인데도 아까보다 더 깊은 맛이 올라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고, 감탄하듯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역시 음식 장사하시는 분이라 바로 알아채시네요. 첫 잔보다 더 깊은 맛이 나죠? 이게 바로 제가 중국차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정말 그러네요. 말로만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정식으로 다도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이제야 이 맛을 알게 되네요."
"이상하게도 조선은 언제부턴가 다도 문화가 사라졌더군요. 중국과 저희 일본은 아직도 다도가 유지되고 있는데 말이죠. 아마도 조선인들은 성격이 급하고 추진력이 강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뭐, 조선인들이 좀 추진력이 좋긴 하죠."
"하지만 이렇게 조금만 참고 기다려 보면, 한 번 우려낸 찻잎이 두 번째에 더 깊은 향을 내듯,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혹시 지금 예상보다 좋지 않은 미래도,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린다면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요?"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제야 꺼내는구나.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혹시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사장은 츠즈키의 의중이 점점 궁금해졌다.
"마음만 바뀌면 됩니다. 세상이 바뀔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굳이 바꾸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사장은 아무 말 없이 츠즈키를 바라봤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사장의 손을 꼭 잡았다. 눈빛은 단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독립운동가 인물사전]
남자현 (南慈賢, 1872~1933)
대한제국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과 정보 수집, 밀정 색출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항일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후에도 조선총독 암살 시도, 항일 선전 활동 등을 이어가다 건강이 악화되어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했다.
영화 ‘밀정’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김삼웅,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