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1946년, 한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17화 - 열정

by 팬터피

**시장 거리**

통화시의 시장 거리는 7월 한여름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차고 바글바글하다. 국수, 오리, 각종 꼬치류 및 다양한 종류의 과일 등 먹거리는 물론, 옷, 이불부터 시계, 바늘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거리에 널려 있다.


이런 북적거림 속에서도 형원은 다른 것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단지 아까 했던 이야기만 계속 맴돌 뿐이다. 아무리 당황했고, 벗어나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밑도 끝도 없는 사랑 고백이라니··· 아직 누구 한 번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열아홉 청춘인데. 생각만 해도 너무 창피했다.


“아저씨, 여기서 또 보네요~ 우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 쳐다보니 예진이었다. 형원은 자기가 너무 그 이야기에 집중해 딴생각을 하다 환영이라도 본 줄 알았다.


“이젠 헛것까지 보이네. 미쳤네.”


“네? 뭐가요? 어떤 헛것요?”


그렇지만 그녀는 진짜 예진이었다. 형원은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인력거 손잡이를 놓칠 뻔했다.


“에에엑~ 식당에 안 있고 여기서 뭐 해요?”


“애호박이랑 배추가 떨어져서 좀 사러 왔어요.”


“아··· 네~ 그럼 잘 사서 가세요.”


“아저씨, 인력거 오래 안 해봤죠?”


오늘만 두 번째 듣는 말에 형원은 찔리는 마음 반, 찝찝함 반의 기분으로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자, 봐봐요. 이게 뭐예요?”


“뭐긴 뭐예요. 애호박이랑 배추죠.”


“근데 제가 아까 뭐랬죠?”


“애호박이랑 배추가 떨어졌다고 했죠.”


“그럼요?”


“네?”


형원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고, 그녀는 그런 그가 너무 답답했다.


“아니~ 장사의 기본이 안 됐어, 기본이. 자, 다시 한번. 제가 아까 뭐랬죠?”


“아··· 됐고. 용건만 말해 봐요!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제가 시장에서 사고 싶은 걸 다 샀잖아요. 근데 이렇게 가녀린 팔목으로 그 먼 식당까지 제가 이걸 들고 갈 수 있을까요?”


“가녀린 건 잘 모르겠지만, 거리가 있으니 좀 힘들겠죠?”


“그러니까~ 난 뭐다? 손님이 되실 몸이다 이거죠. 자! 이제 알았죠? 장사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이거 다 실어요.”


이렇게 새침하게 말하고는 그녀는 인력거에 척하니 도도하게 앉았다. 그런 그녀를 어이없이 한 번 쳐다본 뒤, 형원은 별다른 말 없이 짐을 그녀 다리 옆 쪽에 올렸다.


“자, 출발합니다.”


인력거는 아까 다녀왔던 식당으로 다시 향했고, 형원은 이를 끌며 헛헛한 웃음만 나왔다.


‘내가 이런 왈가닥을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다니···. 나 같아도 안 믿겠다···. 으이구, 병신···.’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녀를 내려주고 식당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북만주 혁신의회**


허름하고 낡은 작은 건물. 그곳의 한 칸 사무실에서 백야 장군이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장군님, 저 범석입니다. 계십니까?”


“네, 들어와요.”


커튼도 치지 않아 어두컴컴한 사무실로 이범석 장군이 들어왔다.


“장군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부모를 잃어버린 꼬마 아이들이 울며 부모부터 찾으려 안간힘을 쓰듯, 나라 잃은 백성이 고민하는 게 잃어버린 그 나라를 되찾는 것 말고 뭐가 더 있겠소.”


“네. 제가 또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요. 장군님, 혹시 통화사 쪽 이야기 들은 거 있으십니까?”


“어떤 걸 이야기하는 거요?”


“독립군이 왜경 하나를 납치했는데, 그곳에 밀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전에 잡혀갔던 어린 동지 둘은 죽었고요.”


“네, 들었소. 참으로 안타깝더라고요...”


이때, 사무실에 노크 소리가 들렸고, 답을 하기도 전에 지정천 장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엇, 대화 중이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계세요. 이 장군, 괜찮죠?”


“그럼요. 거두절미하고, 다음 주에 가는 일정 안 가시거나 미루시는 게 어떠실까요?”


“왜요? 겁나시나요?”


이야기를 듣던 지정천이 말에 끼었다.


“아니 형님, 저희는 형님과 함께 청산리부터 해서 크고 작은 전쟁터를 같이 누벼왔습니다. 저희가 무서워서 그렇겠습니까? 혹시나 가서 형님이 잘못될까 봐 그러는 거죠.”


“오래전부터 준비한 회동인데 이제 와서 미룰 순 없잖소. 그쪽도 강행하길 원하고.”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시기가 안 좋으니 조금만 미루는 건 어떠냐는 거죠.”


“제 생각에도 이건 지장군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정천의 주장에 범석까지 동조를 하며 끼어들었고, 백야 장군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들의 진지함에 사뭇 웃음이 났다.


“둘이 짜고 들어온 건가?”


“그건 아닙니다, 장군님.”


“짠 건 아닌데 저도 이 이야기하러 온 건 맞습니다.”


“나름 조직이 잘 갖춰진 우리도 간부 몇이 체포되면서 신민부가 해체되는 등 흔들리고 있는데, 다른 곳의 상황은 어떻겠소?”


그 말과 동시에, 어둠 속에 앉아 있던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햇빛이 살짝 들어오는 다른 두 장군의 방향으로 서서히 걸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독립이란 하나의 꿈을 가지고 달리고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가서 어찌 이 꿈을 이룰 것인지 논의해 봐야 하지 않겠소? 난 단 하루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은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떻소?”




**예진의 집**


일이 끝나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사장과 예진은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둘이 집에 들어와 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자, 중년 남자 둘이 한 명은 칼을, 한 명은 프라이팬을 들고 정지화면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흠흠··· 배가 고파 뭐라도 해 먹을까 하고···.”


이렇게 말한 이는 바로, 예전에 김종진과 만남을 가졌던 류자명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서 조리기구를 들고 주인을 마주친 상황이 꽤나 민망했다.


“그렇다면 불이라도 켜고 할 것이지. 손가락이라도 썰리면 어쩌시려고요, 익수 동지.”


“하하,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켜고 있으면 혹시나 의심받을까 봐서요. 혹시 이거 드실 건가요? 이리 주세요. 맛 좀 봐도 되겠습니까?”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겼지만, 미소년 같은 맑은 눈망울을 가진 사내는 멋쩍게 웃으며 사장이 든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안에 있는 만두를 한 입에 쏙 넣었다. 삼키기도 전에 우물거리며 아무렇지 않게 사장에게 물었다.


“쩝··· 쩝··· 오늘 경찰서 다녀오신 건··· 음··· 쩝··· 쩝··· 별일 없으셨죠?”


그 말에 사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방 안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의 침묵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무거워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황 단장, 오늘이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마지막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츠즈키가 밀정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더군요. 제가 그를 죽여야 한답니다. 이런 상황이니 한동안은 단체로 모이는 건 자제합시다.”


“그래서요? 선생님,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모르쇠로 일관했죠. 그런데 내 정체와 어쩌면 우리의 정체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미끼를 던진 것이 아닌가 싶군요.”


넷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상황을 곱씹었다. 그리고 어떤 선택이 최선일지 깊이 고민했다.


먼저 류자명이 입을 열었다.


“만약 제안을 거절한다면, 밀정이 누군지 밝혀내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활동을 최대한 조심해야겠죠. 대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변수가 생기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준비가 제대로 될 수 있을지 걱정이군요.”


“아저씨, 그렇지만 그 정보를 듣고 만약 그를 처단한다면, 사장님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예요. 그 위험 부담은 오롯이 사장님께서 짊어지셔야 하는 거고요.”


“만약 그 밀정 놈을 죽인다면, 츠즈키가 과연 그냥 넘어갈까요? 지금 선생님이 독립군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서 미끼를 던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의도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러게요··· 그의 속셈이 쉽게 가늠이 안 됩니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고민해 봐도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깊은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지금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장님, 상황을 잘 판단하셔서 결정해 주세요. 저도 이리저리 정보를 구해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그나저나, 대련에서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친구들 말입니다. 정보에 따르면, 이 근처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 친구들은 상해 임시정부 쪽 사람들이 아니었나요? 이쪽을 지난다면 북만주의 신민부 계열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각 조직에서도 이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반응입니다.”


“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할 텐데···. 아무튼, 다른 소식 들리면 또 알려주세요.”



그때였다.


쾅! 쾅! 쾅!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이다! 문 열어라! 국가에 위협이 되는 비밀 회동이 이루어진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 지금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강제로 부수고 진입하겠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독립운동가 인물사전]


지청천 (池靑天, 1888~1957)


한국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을 이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북로군정서 제2대대 지휘관으로 김좌진 장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후 신민부와 한국독립군을 조직해 쌍성보·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격퇴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초대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전쟁을 준비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기여했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청산리 전투와 한국독립군』(조동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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