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독대
**시내 골목**
‘15, 14, 13, 12’
단 몇 발짝만 더 뛰면 큰길이다. 하지만 타케루의 발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한 순간만 방심하면 등 뒤로 그의 손이 닿을 것 같았다.
‘11, 10, 9, 8’
그때 바로 옆 골목에서 그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형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 장교는 훨씬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빠져나가기 전에 잡히겠어. 그냥 다 포기하고 이제라도 인력거를 버릴까?’
형원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몇 초 후면 저 괴물 같은 남자와 맞닥뜨리게 될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7, 6, 5’
바로 앞에 보이는 골목의 끝에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로 등 뒤로 무시무시한 크기의 발자국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있었고, 형원은 이를 꽉 깨물었다.
반면 타케루는 이제 곧 눈앞에 있는 인력거를 붙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욱 전력을 다해 뛰었다. 이제 저 테러범과는 약 다섯 보 정도 차이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쾅!
큰 소리와 함께 그의 바로 앞에 화분이 떨어졌다. 자칫 조금만 속도를 더 냈다면 그의 머리에 떨어졌을 정도로, 그의 코와 머리카락을 스치듯 바로 앞으로 그게 떨어졌다. 그는 순간 뛰는 것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먼저 위를 올려다봤으나 옥상 쪽에 누가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다시 인력거가 가던 방향을 향해 뛰었으나, 골목 끝으로 바로 큰 시장터 길이 나왔다. 꽤 많은 인파와 돌아다니는 인력거들을 눈여겨봤으나 아까 그놈이 끄는 인력거는 없었다.
타케루는 망설임 없이 좀 전 골목의 건물 안으로 빠르게 들어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옥상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그 골목들이며 시장 쪽 어디에도 수상한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 화분은 진이 던진 것이었다. 그는 형원과 헤어진 후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이들의 쫓고 쫓기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넓지 않아 옥상에서 옥상을 오가며 이들을 따라다녔던 그는, 형원이 위기에 처하자 그를 구하기 위해 화분을 던진 것이다. 그 후 형원이 잘 피한 것을 확인한 뒤,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려와 일본인 장교가 옥상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틈을 타 그 골목을 떠났다.
**츠즈키의 집 앞**
늦은 저녁, 츠즈키가 퇴근 후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그 소리를 따라 뒤를 바라보니 그곳엔 달수가 서 있었다.
“전화로 하지 않고 위험하게 뭘 또 찾아왔느냐.”
“긴요하게 논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알겠다. 그럼 보는 눈이 있을 수 있으니 빨리 들어와라.”
둘은 주변을 살핀 뒤, 은밀히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츠즈키는 간단하게 차를 내어 달수에게 줬다.
“감사합니다.”
“이제 말해보거라.”
“오늘 놓치신 황익수 놈에게 아까 전화가 왔습니다.”
경감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심기가 불편했다. 굳이 오늘 놓친 부분을 언급한 게 더욱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 이 건 말고도 서장도, 만두집 사장도, 거기에 대련에서 온 헌병까지, 오늘 참 이것저것 힘든 날이구나라고 그는 혼자 생각했다.
“그래서? 뭐라 하더냐?”
“자신이 있는 위치를 말해줬습니다. 근데 거기에 그놈 혼자 있는 건 아닌 듯합니다.”
“오호라. 오늘 들은 이야기 중 제일 흥미로운 내용이로구나. 그래. 거기가 어딘가?”
달수는 바로 답을 안 하고 머뭇거렸다. 만약 순사 자리를 요청했다가 안 된다고 하면? 의기양양하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 이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질 않았다.
“음··· 그게 말이죠···”
“뭔데 이리 뜸을 들이는 겐가?”
“어···. 말씀드리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용건부터 말하는 게 어떤가?”
“그게··· 이게 중요한 내용인지라···”
“그래. 알았다. 먼저 해라.”
“저··· 이번 작전이 잘 해결되면 관동군의 자리 하나 보장해 주셨으면 합니다.”
달수의 급작스런 제안에 츠즈키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군이나 경찰서에 조선인 출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일본에서 학교를 나오거나 이 지역 유지의 자녀 등이어서 이 놈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
또한, 이 녀석은 욕심이 워낙 많고, 심지어 어찌 보면 조선 독립군을 배신한 놈 아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일본도 배신할 놈이다.
여러 가지로 자신의 맘에 쏙 드는 놈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이 기분 나빴지만, 우선 독립군 놈들을 무더기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주는 척하기로 했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된다면야 그 정도쯤이야 잘 처리해 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그리만 된다면 경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츠즈키의 승낙을 받아내자 달수는 기분이 좋았다.
“그럼 이제 그 지역이 어딘지 말해보거라.”
“그곳은 바로······ 류허현입니다.”
“거기는 예전 독립군 놈들 학교가 있었던 곳이 아니냐?”
“네, 맞습니다. 그곳에 또 터를 잡았을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그곳에 놈들이 다시 모여 있는 듯합니다.”
“알았다. 혹시나 이건 어디 발설하지 말거라. 어찌 처리할지 서장님과 논의 후에 결정하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결정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가는 달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츠즈키는 그를 한심한 듯 비웃었다.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욕심만 많은 어리석은 놈. 자리를 만들어 달란 제안만 하지 않았어도 그는 이 한심한 놈을 한 번 더 품고 써야겠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져온 정보로 너무 큰 욕심을 부렸고, 이 욕심이 그가 이루고자 하는 꿈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 거라고 츠즈키는 생각했다.
‘어차피 만두집 사장만 잘 꼬드기면 너와는 끝이다. 까짓것 순사가 아니라 서장을 하고 싶다 부탁했어도 내가 들어준다 끄덕였을 거다.’
**사장의 집**
어두운 방에서 사장 혼자 초를 켠 채 서신으로 보이는 글을 쓰는 중에 그의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어요?”
“여기 잠깐 앉으시구려.”
“뭐, 할 말이 있군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일 동이 트자마자 애들을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서 상해로 가는 기차를 타시오. 내가 차후에 다시 연통하리다.”
“네, 몸조심하세요.”
“알겠소. 이 서신을 임시정부의 이동휘라는 자에게 가져다주면 거처를 마련해 줄 거요.”
서신을 전달받은 그녀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문을 나섰고, 사장은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다 잘 마무리될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사장은 아까 앉은 그 자세로 밤을 꼬박 새웠다. 시간이 지나 아침 해가 밝았고, 그는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섰다.
**경찰서**
츠즈키는 아침 일찍부터 순사 한 명을 불러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당장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류허현 쪽에 은밀히 다녀오너라. 거기에 독립군 놈들 은신처가 있는듯하다.”
“네, 알겠습니다.”
순사는 상사의 지시를 받고 바로 경찰서 밖으로 향했다. 츠즈키는 그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낯익은 손님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만두집 사장이 이른 시간부터 경찰서를 방문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예진이 죽기 전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이라 형식적이라도 조사를 받아야 했기에 자리한 듯 보였다.
사장이 츠즈키가 있는 자리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는 생각지도 못 한 손님의 방문에 반갑게 사장을 맞이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그들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들어갔고, 문에 들어서자마자 츠즈키는 문을 잠갔다.
“며칠 새 얼굴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 아이는 잘 보내셨습니까?”
“그 어린 나이에 편히 가기 쉽지 않을 겁니다···.그래서···그 놈은 누굽니까?”
드디어 대어를 낚기 위해 자신이 정성스레 던져 놓은 미끼가 잘 먹혔다는 사실에 츠즈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보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누군지를 알려드리면 저는 뭘 얻을 서 있습니까?”
“경감님이 원하시는 게 뭔가요? 먼저 말씀해 주시죠.”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그놈을 죽여주시는 겁니다.”
“제가 안 죽인다면요?”
“그럼 별 수 없죠. 근데 사장님은 그 대가를 치르시게 될 겁니다.”
“어떤 댓가요?”
츠즈키는 다시 아무 말없이 딴청을 피우며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실은 사장이 당연히 복수심에 불타 미끼를 물거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차분히 대응하자 어찌 대답을 해야 할지 시간을 버는 중이었다.
경감의 대답을 기다리던 사장은 그의 침묵에 답답함을 느끼고 다시 말을 꺼냈다.
“제가 독립운동 단체 사람인 걸 눈치채신 거죠?”
[독립 운동가 인물 평전]
이동휘 (李東輝, 1873~1935)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선구자이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해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해 사회주의와 민족운동을 결합하려 했으며, 1919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35년 소련에서 병사하였고,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