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지옥
**형원의 집**
“도···망···가···미···안···빨리···도···망···”
결국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고, 모녀는 그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언제나 자신들만을 위해 살았던 가장이란 큰 우주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이는 형원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곳에서 그는 눈물도 더 이상 나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짐승 같은 일본군은 이 상황 앞에서 비웃으며 군침만 흘릴 뿐이었다.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뽀얀 얼굴의 십 대 여자아이가 그들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앞으로 다가갔다.
“중령님, 어린애 먼저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시죠.”
“난 관심 없다. 아래 애들 후딱 놀려주고 정리하자. 여기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네, 알겠습니다.”
소위 하나가 혜원을 향해 걸어가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 방으로 끌고 가려했다. 그러자 엄마는 소위의 팔을 잡고 그녀에게서 떼어놓으려 안간힘을 썼다.
“놔라! 우리 딸은 안 된다.”
“걱정 마라. 내년도 내가 곧 이뻐해 주마.”
주변을 둘러싼 군인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힘으로 안 되겠다 싶었던 어미는 소위의 팔을 꽉 깨물었다.
“아악! 이 년이 미쳤나!”
화가 난 소위는 그녀를 발로 찼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녀는 남편 옆에 있던 총을 들어 그 소위를 향해 총을 쐈다.
탕! 탕! 탕!
이에 놀란 병사들이 총을 들어 여기저기 총을 난사하는 그녀에게 방아쇠를 당겼고 그녀는 머리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동시에 혜원도 자신을 끌고 가려했던 병사의 총을 빼앗아 주변에 있는 일본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녀 역시 어머니처럼 당황한 적들의 총알이 여기저기 박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형원은 아빠의 죽음을 목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누나까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보게 되어 큰 충격에 빠졌다.
그렇지만 그 슬픔만큼이나 자신도 저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역시 컸다. 그는 좁고 어두운 바닥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잔인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에이 아까워. 머저리 년들. 다 죽었네.”
“야, 너희 둘. 여기 다 불사르고 소장님 시신 챙겨서 마을 입구로 넘어와.”
“네, 저 놈은 어찌할까요? 그냥 대가리 날려버릴까요?”
한 병사가 두열의 아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됐다. 그냥 둬라.”
중령이 간단히 답한 뒤 대문을 나섰고, 정리를 명령받은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일본군이 일사불란하게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쭈뼛대며 눈치를 보던 두열 아범도 조금 후에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 나갔다.
“야, 뭐 해.”
남은 둘 중 한 병사가 정리를 하다가 가만히 있는 다른 하나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 일로 와봐. 아직 따뜻해.”
한 병사가 혜원의 얼굴을 만지다가 가슴에 손을 댔다. 그리고 웃옷을 찢자 그녀의 작은 가슴이 드러났다.
“완전 이 새끼 발정이 제대로 났구나?”
“와 씨, 나 못 참겠다.”
하나가 급히 바지를 벗으려 벨트를 풀자 나머지 하나도 상대에 질세라 재빨리 바지를 내렸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이 혜원의 다리를 벌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뒤 속옷을 벗기려 치마에 손을 넣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서서 바지를 벗던 군인이 몹쓸 짓을 하려던 군인 옆으로 퍽 하고 쓰러졌다. 그는 재빨리 고개를 뒤로 돌리자 장전이 안 된 총을 쏘려고 방아쇠만 계속 당기고 있는 열 살짜리 꼬마가 보였다.
“이런 젠장!”
그는 꼬마를 저지하려 벌떡 일어나 달려갔으나 바지를 다 벗지 않은 상태라 바지에 걸려 자빠졌다. 어린 형원은 무섭고 당황해서 계속 똑같이 그 병사를 향해 방아쇠를 눌러댔으나 장전이 되지 않은 총은 발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쓰러져 있던 상대는 빨리 바지를 추켜세우고 다시 일어나 꼬마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있는 힘껏 점프해서 그의 총을 뺏으려 했다.
탕!
다행히 적이 형원의 총에 닿기 직전에 그는 장전을 하고 총을 쐈다. 총알은 상대의 머리를 관통했다.
“아아악! 누나! 아빠! 엄마!”
이제야 그는 가족들 사이에서 마음 놓고 소리 내며 크게 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오열한 그는 끙끙대며 힘들게 그들을 마루로 옮겼다.
그리고 집에 기름을 뿌린 뒤 성냥을 꺼냈다. 손이 벌벌 떨려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열 번도 넘게 시도한 끝에 드디어 성냥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한 번에 집에 불을 붙일 수 없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들에게 불을 붙인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으···흑···흑···.”
결국 성냥은 꺼졌고, 그는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다시 결심한 듯 겨우겨우 성냥에 불을 붙이고 이를 고민하다가 결국 집에 던졌다.
불이 빠르게 집으로 번져나갔다. 그는 조금 떨어져 멍하니 이를 바라보다가 주섬주섬 떨어진 총과 일본군의 옷가지와 짐, 총알, 수류탄 등을 그들의 가방에 챙겼다.
“다 그 새끼 때문이야.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그는 미친 사람마냥 같은 말만 혼자 중얼거리며 대문 밖을 나섰다. 그리고 불타고 있는 집을 바라보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아빠, 엄마, 누나···. 이 복수는 제가 꼭 하고 갈 테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형원이 나가고 얼마 뒤 다리를 절며 한 남자가 거지꼴을 한 채 이 집으로 뛰어왔다. 그는 바로 범석이었다.
“아!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그는 아수라장인 마당의 모습과 불타고 있는 집, 그리고 그 안의 시신들을 보며 마당에 무릎을 꿇고 좌절했다.
“가족들이라도 지켜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두열의 집**
집집마다 불타고 있는 마을을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던 형원은 걸음을 멈췄고, 그 앞은 그의 친구인 두열이네 집이 보였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집이었다.
‘마을 사람들 밀고해서 혼자만 살아남았구나··· 배신자 새끼···’
이 점에 화가 난 그는 윗입술 한쪽이 꿈틀거렸다. 그는 총을 들고 조심히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섰을 때, 형원은 들고 있던 총을 떨궜다. 친구인 두열이와 아주머니는 칼에 찔려 마당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마루를 보았을 때, 대들보에 노끈을 묶어 목을 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친구의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저씨! 안 돼요!”
재빠르게 마루로 뛰어 올라간 형원은 그를 도우려 했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컥···흑···억···.. 미···.안···..”
그 말을 남기고 잠시 후 그의 움직임이 사라졌고,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형원은 이제 울 기운도 없었다. 그는 떨어뜨린 총을 챙겨 마을을 떠났다.
하루 종일 어디를 가야 할지 몰라 산속을 걷던 그는 숲 속 길가에서 쓰러져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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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야! 정신 차려! 야!”
한참 후, 주변을 지나던 독립군들은 어린 꼬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떤 것 같나?”
“숨은 쉬는 게 잠에 든 것 같습니다.”
“일본 놈들 피해 겨우 도망친 아이 같구만.”
“네, 가방에 일본 놈들 무기가 들어 있는 거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자네가 짐을 좀 들어주게. 내가 이 친구를 업겠네.”
“무겁지 않으시겠어요? 제가 아이를 안겠습니다.”
“아니네. 가다가 무거우면 말하겠네.”
아이를 업고 해당 부대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러다 산 중턱에서 곳곳에 불타고 있는 마을이 보여 안타깝고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찢어 죽일 놈들··· 일반 백성들에게 저런 짓을 하다니···”
“우리의 갈 곳을 없애려고 그런 거겠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번 전투의 목적은 어쨌든 우리를 해산시키려 하는 거였으니.”
“대장님, 그럼 우린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봉오동엘 다시 갈 수도 없고 말이죠.”
“음··· 아무래도 우리는 러시아로 가야 할 것 같네. 이래서야 어디를 가나 우리 백성들이 위험해질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네.”
“네 알겠습니다! 잘들 들어라! 우리는 러시아로 간다!”
장군 하나가 병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네! 까짓것! 러시아로 갑시다!”
“좋습니다!”
그들의 함성 소리는 백두산에서 호랑이처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웅성거림에 형원은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일어났느냐?”
“네···.”
“혹시 가족들은?”
“······”
“말 안 해도 된다. 좀 더 자두거라. 우리와 함께 가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형원은 꾹 참고 그의 등에 기대 다시 눈을 감았다. 장군은 미세한 떨림으로 아이가 흐느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형원의 과거편 끝 -
[독립운동가 인물평전]
허위 (許蔿, 1855~1908)
경북 구미 출신의 의병장으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격분해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경상·충청·강원 일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했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는 허위가 총대장이 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다. 실패 후 체포돼 1908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