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가족
**백두산 계곡**
굽이진 험난한 계곡길을, 나뭇가지에 팔과 얼굴 등이 긁혀 피가 나는지도 모르고, 범석은 무작정 뛰어내려 갔다. 그는 한 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뛰었다.
‘형님, 제발 살아만 계세요. 제발.’
탕! 탕!
그때 그의 바로 옆으로 총알이 스치듯 지나갔고, 깜짝 놀라 돌부리에 발이 걸려 옆의 비탈길로 굴러 떨어졌다.
“저쪽으로 떨어졌다. 확인하라!”
총을 쏜 일본군 대여섯이 범석이 떨어지기 전 언덕 부근으로 달려와 두리번거리며 그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 그는 적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몸을 바닥에 밀착시켜 숨겼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러나 일본군들은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범석이 숨은 곳을 향해 내려와 수색 범위를 좁혀 나갔다. 계곡에 울려 퍼지는 군화 소리가 범석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숨어서 상대의 수를 확인한 범석은 총을 들었다. 그러나 그에겐 적들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잠깐 고민을 하던 그는 다시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다 비탈길 방향으로 뛰어내려 갔다.
“저깄다! 잡아라!”
적의 총알이 빗발쳤다. 그러나 범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험한 산길을 계속 뛰었다.
**형원의 집**
무릎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는 체념한 듯 땅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버지의 발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걸 본 형원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뛰는 심장이 제어가 안 되어 호흡조차 잘 안 될 지경이었다.
겨우겨우 크게 숨을 한 번 내쉴 때쯤, 그의 아버지는 쓰러져 있는 불쌍한 동네 주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총을 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제가··· 전쟁에··· 안 간다고 했잖아요··· 하아···”
그의 눈물이 총을 잡은 손등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방아쇠를 당겼다.
형원은 총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희한하게 총소리가 계속 나서 실눈을 뜨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고, 일본군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태석의 총알은 두열이네 아버지 뒤에 있던 도모유키를 향했다. 그리고 재빨리 상대를 향해 뛰어가 그를 방패 삼아 일본군을 향해 총을 쐈다. 적들은 혹시 자신의 상사가 총을 맞을까 두려워 제대로 공격을 할 수 없었다.
“멍청한 놈들아! 저 년들부터 잡아! 콜록···”
피를 흘리면서도 도모유키는 태석의 가족을 인질로 잡으라 명했다. 그러나 눈치 빠른 그의 아내는 딸을 데리고 건물 뒤로 이미 도망친 상태였다. 소장의 명령을 받은 병사 둘이 그들을 쫓으려 했으나, 태석은 도모유키의 권총을 뽑아 건물 뒤로 가려는 병사를 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도모유키는 저항하기 위해 허리춤에 있는 칼을 뽑았으나, 태석이 그의 손목을 꺾는 바람에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석은 바로 자신에게 총을 겨눈 병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어리석은 짓이다. 곧 총소리를 듣고 병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올 텐데, 그들도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이 마을 사람들을 안 건드린다 약속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날 죽일 수 있겠나? 그럼 네 아내와 곱상한 딸년이 어찌 될 것 같으냐? 전쟁터에 나와 여자 구경도 못한 혈기왕성한 놈들 투성인데.”
상대의 집중을 흩트리기 위해 도모유키는 계속 태석을 자극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그는 적의 자극이 거슬렸지만,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의 움직이는 발과 대화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어린 형원은 계속 어쩔 줄 몰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때 또다시 두열이네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한편, 집 뒤쪽으로 도망치던 엄마는 뒷문으로 나가다 급히 멈춰 섰다. 그리고 잡고 있던 딸의 손을 놨다.
“혜원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숲 속으로 뛰어가서 멀리 달아나. 여긴 걱정하지 말고. 우리는 기차역에서 만나자. 알았지?”
“왜? 엄마도 같이 가야지.”
“형원이가 대청마루 아래에 숨어 있어. 아빠도 저러고 있고.”
“그럼 나도 같이 있을래.”
“미쳤어. 어찌 될지 알고! 너라도 도망가야지!”
“엄마, 나 혼자 가족들 버리고 어떻게 도망가! 난 못해요. 싫어.”
“너 여깄으면 아빠한테 방해만 돼. 우리가 도망가야 아빠가 뭘 해도 하지!”
“내가 더 작고 빠르니까 몰래 옆으로 가서 형원이 빼올게요. 응?”
“안 돼. 빨리 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그때 멀리서 북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자연스레 그쪽을 바라봤고, 수십 명의 일본군들이 뛰어오는 걸 발견하고는 급히 돌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그들은 적들에게 이미 노출된 이후였다.
“이 집이다! 여자 둘이 방금 숨었다. 잡아라!”
수십 명의 적이 멀리서 형원의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앞마당 쪽으로 다가갔다.
“너 아래로 빨리 들어가.”
“응?”
엄마는 형원이 있는 마루 아래로 숨으라고 딸을 재촉했다. 그녀는 딸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너도 동생처럼 아래로 기어 들어가라고.”
둘이 나누는 이야기가 형원의 귀에 어렴풋이 들어왔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자세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누나와 엄마가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뛰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 내가 지금 여기 어떻게 들어가요? 일본 놈들이 내가 사라진 걸 알면 마루 밑을 찾아볼 수도 있잖아. 그럼 형원이까지 위험해지는 거잖아요. 쟤라도 안전하게 있어야죠···”
이 말을 들은 형원은 두려움에 벌벌 떠는 와중에 오열했다. 자신은 비겁하게 여기 숨어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모두 자신보다 가족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모녀는 앞마당으로 다시 돌아왔고, 얼마 남지 않은 적들은 이 모녀에게 총구를 겨눴다.
“잘 생각해라. 너희 상관의 목숨이 나한테 달려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군인들이 망설이는 사이 엄마와 딸은 태석의 등 뒤로 숨었다. 그들은 집을 등지고 일본 병사들과 대치해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뒷문을 통해 서른쯤 되는 적들이 더 들어왔다.
“한심한 조센징아, 이제 포기해라. 다 끝났다.”
대치 중인 일본군 중 수장으로 보이는 중령이 태석을 향해 가소롭다는 듯 경고했다.
“다시 말하겠다. 이 놈의 목숨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길을 터라.”
“소장님, 총 맞은 곳은 좀 어떠십니까?”
“난 괜찮다. 걱정 마라. 마을 사람들을 좀 끌고 와라. 그래도 이 놈이 포기를 안 하는지 보···.”
탕!
소장의 대답이 다 끝나기도 전에 중령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쐈다. 모두가 이 상황에 놀랐지만, 당황할 새가 없었다. 적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고, 태석은 급히 총을 떨구고 등을 돌려 가족을 감쌌다.
탕! 탕! 탕! 탕! 탕! 탕! 탕! 탕!
수십 발의 총알이 태석에게 박혔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족들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러나 바로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여보!”
“아빠!”
모녀는 절규하며 쓰러진 태석을 안았다. 태석은 그 와중에도 계속 피를 토하며 중얼거렸다.
“도···망···가···미···안···빨리···도···망···”
결국 그의 고개가 툭 떨어졌고, 모녀는 그를 부여잡고 오열했다. 언제나 자신들만을 위해 살았던 가장이란 큰 우주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이는 형원도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곳에서 그는 눈물도 더 이상 나지 않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의 죽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짐승 같은 일본군은 이 상황 앞에서 비웃으며 군침만 흘릴 뿐이었다. 도시에서도 보기 힘든 뽀얀 얼굴의 십 대 여자아이가 그들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앞으로 다가갔다.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편강렬 (片康烈, 1890~1942)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3·1운동 직후 대한독립단에 참여했으며, 이후 서로군정서에서 군사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참의부의 중대장, 선전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 무장투쟁과 독립군 양성에 헌신했다. 또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에도 앞장섰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활동을 지속하다 1942년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