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로글쓸러 Dec 12. 2024

야구장의 그 모든 게 좋습니다. 야구 하나만 빼고요.

저는 생각 이상으로 중증 질환을 가졌습니다. 야구 말이죠.

밤하늘은 참 맑습니다. 하늘을 가득 채운 어둠에서부터 경쾌함이 몸소 느껴져요. 한밤중에도 불빛이 가득한 부산에서는 별빛으로 수놓은 하늘을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가을의 기운을 가득 담은 하늘은 언제든지 바라봐도 상쾌하기 그지없어요.


이 곳은 사직야구장입니다.


사직은 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야구의 도시, 부산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사람들은 야구장을 많이 찾아와요. 덕분에 언제 가더라도 홈 좌석은 꽉 차 있어요. 부산 시민들과 야구를 즐기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오늘은 사직야구장에 어떤 음식 냄새가 퍼질지, 그 와중에 저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혹시나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화창하다면 행복하게 야구를 즐기게 되죠. 야구장 곳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부터, 맥주와 함께 이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가족들, 연인들, 친구들. 오순도순 같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사직야구장의 분위기는 활발해집니다. 거기다 예쁜 치어리더들과 이기든 지든 당당하게 응원을 외치는 조지훈 단장님과 함께 소리를 지르고, 응원에 맞춰서 흔들다 보면 다이어트는 절로 되죠. 여담이지만 사직야구장에서 나오는 응원 소리는 어마어마합니다. 이건 직접 겪어봐야 해요. 저도 소리 지르니 할 말은 없다만, 다 같이 외치는 응원 한마디에서부터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야구장을 다녀오면 기운을 가득 얻고 왔다고나 할까요?


참 예쁘죠.


거기다 야구장에서 이루어지는 각기 각색의 행사들도 존재합니다. 타 팀이 롯데 자이언츠 응원석에 앉아 있다? 환승 야구라는 프로그램을 합니다. 유니폼과 모자를 줄 테니 롯데 자이언츠로 개종(?)하라는 행사인데요. 지금까진 환승 안 한 사람을 본 적은 없어요. 거기다 매 경기 있는 키스타임은 사직의 명물 프로그램입니다. 전광판을 통해 보고 있으면 재밌긴 합니다. 물론 저는 해보지 않았습니다. 5회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면, 이땐 사직 노래방이 열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방이라 불리는 사직 노래방! 관중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즐기는 이 시간은 그 자체로 행복합니다. 그 이외에도 맥주 마시기 시간, 치어리더 따라 춤 따라 하기 등등 재밌는 일들이 가득한 곳이 바로 사직야구장이죠. 


부산 사람들의 열기를 한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평소에 보지 못하던 밤하늘, 개인적으로 야구장 중에 최고라고 여기는 사직야구장! 이들이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던 날들은 생각보다 많아요. 바로 야구 경기 때문이죠. 


2024년 시즌 동안 총 야구 경기를 40번 봤습니다. 그중에서 패배는 총 17번입니다. 올해도 여러 종류의 패배를 ‘직접’ 목격했죠. 


직관 3연패인 형을 데리고 갔다가, 4연패……. 결국 5연패까지 달성했습니다. 엘도라도만 부르면 홈런을 치는 모 구단 덕분에 말이죠. 

바둑엔 접바둑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고수가 하수에게 돌 미리 몇 개를 놓고 시작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런 접바둑처럼 시작 5분 만에 3점을 내줬던 경기가 있었죠. 그러다 결국 9대 7로 2점 차이까지 따라잡았지만 졌습니다. 희망만 줬던 경기죠. 이런 경기도 있었어요. 4대 3으로 지던 상황에 만루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타율 0에 첫 타석을 서는 선수가 들어오네요? 그런데 대타는 없네요? 아……. ‘역시나’가 ‘혹시나’였고, ‘혹시나’가 ‘역시나’였습니다. 만루의 희망이 그렇게 날아갔던 기억도 있습니다.

아예 재미가 없던 경기도 있었습니다. 단 1점 차이였습니다. 상대도 못 해서 잘하면 이길 거 같은데 에러를 만들었고요. 결국엔 1점을 더 내지 못해서 2대 1로 졌죠. 안타를 상대 팀보다 2배로 쳤지만 에러 2개를 만들면서 5대 4로 허무하게 졌던 추억도 있습니다. 

“이거 완봉하겠는데요?”라고 말을 꺼냈다가 에러가 발생하고, 그때를 기점으로 점수를 엄청나게 내줬던 경기도 있었죠. 드리님과 갔던 경기니깐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희망만 주기도 하고, 이길 거 같지 않은 기분을 선사하기도 하는 등 패배가 예견되는 날엔 야구 말고 모든 게 재밌더라고요. 야구를 즐기러 갔는데 말이죠.


출처, Pixabay


야구 빼고 재밌는 날엔 허무함이 몰려옵니다. 드리님이 말하신 것처럼, 야구가 확실히 가성비 있는 취미예요. 사직야구장 기준으로 평일 15,000원, 주말 20,000원이면 솔직히 엄청난 가성비죠. 술 한잔만 해도 3만 원이 넘게 나오는 세상인데, 이 정도면 양반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경기를 보고 있으면 정말 가성비 있는 게 맞나 의심이 됩니다. 특히나 올해 여름은 말도 안 되게 더웠잖아요? 폭염주의보가 뜰 정도로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이곳보단 집에서 치킨 시켜서 넷플릭스 보면서 에어컨 밑에 있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도 문득 들더라고요. 아! 가성비 측면으로 생각하면 더운 날씨에 야구 보는 장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곳이 찜질방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는 이곳에서 노폐물을 배출하러 왔다! 땀을 쭉 빼고 가자! 문제는 야외 찜질방에서 탈출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거죠. 진짜 찜질방엔 아이스 방이라도 있잖아요? 차라리 러닝화 한 켤레 신고 주변 풍경도 즐기고 심신도 가다듬는 게 더 가성비 있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보면, 드리님은 가성비 있는 취미를 잘 즐기십니다.


사직야구장 입장권, 출처 롯데 자이언츠


패배의 쓴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저지만, 저는 이미 만성 롯데 증후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증후군을 느낀 시점이 언제냐! 야구장에 갔는데 갑자기 내리는 비로 경기가 취소되었을 때, 증후군의 존재를 깨달았습니다. 일기예보엔 비가 올 거라고 적혀있었죠. 하지만 당일이 되니 맑았습니다. 역시나 일기예보는 틀렸어! 그렇게 건방을 떨면서 우산을 가지지 않고 야구장을 갔습니다. 그날의 저녁인 햄버거를 사서 자리에 앉는 순간, 마법처럼 비가 오더라고요. 아니, 쏟아진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군요. 그날은 내야에서도 좋은 자리를 예약한 날이었는데……. 야구 경기가 정말 잘 보이는 자리였는데……. 건방 떤다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아 다 젖어버렸습니다. 큰맘 먹고 왔단 말입니다. 집에서 야구장까지 40분은 걸리는데, 야구장까지 와서 경기 취소 소식을 들으면 화가 나요. 이럴 거면 제대로 비가 오던가? 그러면 나오지도 않았을 거고 비도 맞지 않았을 텐데. 비 때문에 얼어 죽을 거 같은 와중에 햄버거는 젖어버려 먹을 수 없게 되니,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는 신기한 경험을 겪었습니다. 힐링하고자 맛난 거 먹기로 결심하고 단백질 보충 차원으로 고깃집으로 향합니다. 고기를 구워요. 향긋한 냄새. 화르르 타오르는 불길을 머금은, 육즙 가득한 그 고기를 입에 넣었지만 행복하지 않아요. 고기의 즐거운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든 고기를 쑤셔 넣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비가 오지 않네요? 다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비가 와서 야구가 취소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돔구장을 만들어야지! 매일 야구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할 거 아냐!


비오면 야구장은 이렇게 됩니다.

여기서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비 오면 조용히 집 가서 놀면 되는데 야구 안 한다고 화를 낸다고? 고기를 먹어도 기쁘지 않고, 비가 멈추니깐 다시 분노한다고? 생각보다 제가 중증의 롯데 증후군을 가졌다는 걸 이때야 깨달았습니다. 


추가로, 직관 티켓 예매가 어려워졌다는 걸 드리님이 언급하셨죠. 프로야구가 부흥하는 건 기쁠지라도, 제 표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아주 슬픕니다. 이전에는 전날에라도 야구장 가서 표 사면 볼 수 있던 게 야구였단 말이죠? 이젠 그럴 수 없다는 게 마냥 아쉽습니다. 그래서 요샌 티켓팅 실패할까 봐 심장이 쿵쾅쿵쾅 뜁니다. 이때도 확 와닿았습니다. 나 만성 롯데 증후군 말기일지도 모르겠구나…….


비오면 제 마음은 이렇습니다. 야구 팬들 마음도 그렇습니다. / 출처 SBS / 참고로 그룹 하이라이트입니다.


드리님, 길고 길었던 2024 정규 시즌이 끝났습니다. 어느덧 10월 말입니다. 가을 야구도 끝났습니다. 최초의 5위 결정전, 5위로 올라온 KT가 4위를 꺾고 3위의 삼성과 대결하는 모습, 삼성이 KT와 LG를 꺾고 한국 시리즈에 진출, 올해의 우승자로 기아 타이거즈 확정. 그 모든 걸 정말 편안하게 봤습니다. 남의 팀이 하는 야구는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누가 이기든 상관없으니까요. 막말로, TV를 언제든지 꺼도 상관없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팀이 아닌 이들이 한국 시리즈를 하는 모습을 보니깐, 분하더라고요. 다른 팀의 가을 야구를 보면서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야구가 보기 싫을 때도 분명히 있었지만, 막상 그립다는걸요. 패배하기만 하면 슬퍼하고 화내는 저지만, 벌써 2025시즌을 갈구하고 있는 스스로를 보니 저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요.


2024 KBO 포스트 시즌 / 출처, KBO


돌이켜보면 똥 맛 같은 패배를 하는 자이언츠지만, 고급 요리 같은 승리를 선사하기도 한 게 바로 롯데입니다. AI조차 패배하리라 예측했던 경기를 무승부로 만듭니다. 맥주 마시러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여긴 경기를 이닝 연속으로 7점씩 내서 이긴 경기도 있었죠. 투수들의 호투로 끝까지 막아내서 깔끔하게 승리도 거뒀습니다. 중요한 순간에 홈런을 쳐서 이긴 경우도 꽤 많았어요. 심지어 하루 연속 3번 홈런을 치는 황성빈 선수를 보기도 했었고요. 1할 타자들의 연타석 홈런으로 역전하는 드라마도 봤어요. 끝내기 만루 홈런으로 도파민을 터트리게 만들기도 했죠. 10등일 때 1등을 상대로 스윕하며, KBO 10개 구단 체제 형성 후 10위 팀이 1위 팀을 상대로 스윕한 최초의 사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40번의 직관 중 승리는 21번, 무승부는 2번을 목격했습니다. 생각보다 2024시즌은 야구의 즐거움을 눈에 많이 담았던 시즌입니다. 


출처, 롯데 자이언츠


그립습니다. 빅터 레이예스의 202안타라는 신기록과 함께 1승으로 이번 시즌 유종의 미를 거뒀습니다. 깔끔하게 마무리를 잘했지만, 이 아쉬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달려 2025년이 빨리 도달하길 바랄 뿐입니다. 물론 2024년 12월 24일, 25일을 솔로로 보내야 하기에 싫어서 2025년을 갈구하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내년 시즌의 기다림은 드리님이 말한 첫 마라톤의 마지막 2km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멀게 느껴지지만, 여기서 힘을 내면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거리로 다가옵니다. 돌이켜보면 야구까지 남은 기간이 5개월로 매우 길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이 폭발적으로 금방 지나가리라 믿겠습니다. 마지막 1km에서 에너지가 폭발해서 좋은 기록을 달성했던 드리님처럼 말이죠. 기쁨과 행복의 함성이 넘쳐나는 사직야구장에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출처, 유튜브 팬롯데


드림님 말처럼, 올해의 트레이드와 FA, 드래프트 된 선수들의 성장, 기존 선수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 야구판이 어떻게 흘러갈지 함께 지켜보죠. 그리움을 이젠 기대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이니까요.


- 만성 롯데 증후군에 걸려, 추위고 뭐고 야구장에 가고 싶은 주니 올림 - 


이제는 스토브리그 시작입니다 / 출처, 드라마 스토브리그


PS 1. 드리님, 현재 스토브리그(겨울철 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는 기간에 이루어지는 팀의 재정비 기간)이잖아요? 이 시점과 어울리는 드라마 [스토브리그]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편지엔 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PS 2. 저도 러닝을 좋아하지만, 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러닝머신 위를 누비는 무법자인 전 70분 동안 10km를 뜁니다. 다음에는 저와 함께 마라톤에 도전할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