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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인트리 Aug 06. 2021

진격의 58세

나이 많은 사람의 재취업은 어렵다.




 새벽 5시, 커피포트에 물을 넣는다. 배꼽이 보일 정도로 기지개를 켜 본다. 창밖은 아직 어둠 속에 묻혀있다. 창문을 살짝 열어 보니 서늘한 공기가 기분 좋게 들어온다. 아직 산새들도 잠들었는지 사방이 조용하다. 집안에 커피 향이 퍼지고 나도 아침을 먹는다. 뜻밖에 아침이라 위장이 놀랜 신호를 보낸다. 다다닥 화장실을 다녀오고 다시 아침을 먹는다.  출근 첫날인 오늘을 위해서 먹어둬야 한다.


몇 달 쉬다가 다시 시작한 취업활동, 58세에 취업이라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이력서를 넣으면 저희는 경력자를 원합니다.라는 답변을 다. 가고 싶고 하고 싶던 일에는 모두 나이가 걸림돌이 되었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말짱해서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사회의 잣대는 그렇지 못했다. 일을 시작해 봤자 2,3년 후엔 퇴직하게 되실 텐데~ 혹은 가르쳐서 일을 같이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셔서~예쁘게 거절을 해도 결국은 거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하고 싶은 나이 58세였다. 이제 오롯이 나를 위해 살고   싶었다.  원하던 일에 자신이 있었는데 사회는 나를 원하지 않는 듯 보였다. 자격증도 나이에 밀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다행히 엉뚱한 곳에서 입사 연락이. 왔다.  일단 입사를 시켜 준다는데 반가웠다. 회사에 대한 인터넷 검색을 마치고, 회사에서 운영하는 매장도 방문해 봤다. 내게 정해진 일은 생산직이었다.




자녀가 성인이 되니 아이들의 감시가 심했다. 엄마가 약은 제때 챙겨 먹는지 음식조절을 잘하는지 매사에 간섭이다. 불과 몇 년 전에 내가 아이들에게 하던 잔소리를 요즘은 내가 듣곤 했다. 그때는 내가 아이들을 위해서 폭풍 잔소리를 했고 지금은 완전히 반대다. 모임자리에 가면 술 조금 먹으라고 잔소리, 늦게 되면 어서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했다. 거기에 엄마가 취업을 하고 싶어 안달을 하니 아이들도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입사 결정을 하고는 아이들이 매일 운동을 시켰다. 젊은 사람이랑 같이 일한다면서 엄마가 체력에 밀리면 상처 받을까 봐 걱정이라고  세 녀석이 교대로 엄마를 끌고 나갔다. “언니야 오늘 언니 차례다. 엄마랑 운동 나가.” 매사에 확실한 둘째는 운동 순번까지 정해뒀다. 그리고는 고기를 하루에 한 끼 씩 먹으라고 밥상을 차렸다. 나는 채식주의라 고기를 싫어하는데 엄마 식성과는 상관없이 식단이 짜이고 있었다. 건강해야 일도 재밌고 인생도 재밌다는 게 딸들의 지론이었다. 엄마가 배운다.



나는 일을 좋아한다. 일을  할 때는 일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이 없다. 식구들은 엄마는 일 중독이라고 했다.  내 고집이기도 했고 일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워라밸이 좋아야 일을 오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과 삶이 적절한 조화를 이뤄 줘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가족들만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살았더니 어느 날 내게도 빈집 증후군이 찾아왔다. 아이들이 잘 자라 준 것에 만족하고 행복을 거기에 두려고 해도 내가 없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내 이름 석 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깊은 우울과 허전함으로 이어졌다. 돈이라도 많았으면 그 허전함이 덜했을까 싶은데 나에게는 그마저도 없었다. 이것저것 공부를 해보고 닥치는 대로 배워보고 그래도 이대로 그냥 늙어지는 게 안타까웠다.


 남들이 투자를 이야기하고 N 잡러의 길을 이야기했다. 나도 부동산 공부를 위해 학원으로, 주식공부를 위해서 카페 모임으로 쫓아다녀 봤다. 그런데 공부는 공부일 뿐 거기서 더 나아가지를 않았다. 타고난 문과였다. 더하기가 만 단위가 넘어가면 골치가 아팠다. 빼기는 천 단위 넘어가면 더욱 골치가 아팠다. 계산하고 계획하고 투자를 할 줄 아는  이런  안목이 전혀 없었다. 일상이 대충 손해보고 흡족해하는 타입이었다.  극복해 보려고 따라 해 보기도 해 봤지만 정말 쉽지 않았다. 내가 투자하려고 하면 항상 끝물이었다. 물론 큰돈도 없어서 겨우 쌈짓돈 준비한 투자금이었지만 말이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래 세상에는 몸으로 일을 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돌아가기도 하는 거야~" 나는 나의 한계를 인정해야했다. 땀 흘려 일하는 쪽을 택했다.


 생산직이라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당당한 사회인인가. 더구나 내 이름으로 월급 통장 받아보기를 얼마나 염원했던가. 영화 인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70세의 벤처럼 50대 후반의 일을 즐기면서 할수있는  때가 온 것이다. 제조업의 생산직이 50대가 대부분이다. 만나보니 모두 친한 이웃같다. 그런가운데도 같이 일을 해보니 주부로 만나지던 때와는 결이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일을 얼마 동안이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감사하고 즐겁다.  


공자님 은 어디를 가든 마음을 다해 가라는 말을 하셨다. 지금의 내 나이가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길 때인 것 같다. 노년을 코앞에 두고 직장생활을 시작 했다는 사실이 나를 당당하게 한다.

출근복장으로 챙기고 나오니 우리 둘째 한마디 한다.

“오~~ 진격의 58세, 멋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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