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어렸을 때 12년 정도 일기를 썼다. 딸들이 서른이 넘은 지금 그때의 일기장을 가끔 본다. 어느 날은 세 딸들이 자신들 어릴 때 엄마가 써놓은 일기를 보면서 엄마는 그때 왜 그랬냐고 묻기도 하고 ‘이날 너무 속 상 했어, 하면서 위로를 받기를 원할 때도 있다. 나도 가끔은 그 일기장을 들춰 보면서 새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일기장을 볼 때마다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우리 어릴 때가 제일 힘들고 피곤해 보였는데 일기장은 맨날 행복하다고 쓰여있어. 너무 미화된 거 아니야?”
온몸으로 힘들 때 이기는 했다.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시누이가 있어서 병시중을 들어야 했고, 남편 사업장의 직원 일곱 명이 집에서 같이 지내니 그 식구들 밥을 해 먹여야 했다. 그때는 대부분 시골 동생들이 직원이어서 어디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쓸데없는 호기와 인정이 많은 신랑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 줄 것처럼 직원 들을 집으로 데려 왔지만 집안일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었다. 게다가 내 아이들은 셋이나 되어서 나의 하루는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고, 내 감정을 느껴 볼 정신이 없었던 시기이기는 했다. 시누이 병시중과 밥과 빨래로 하루를 보내던 터라 정작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너무 잘 놀았다. 셋이서 책을 읽어주고 서로를 돌보고 아픈 고모를 위해 책을 읽어 주고 운동을 시켜주었다. 열 살도 안 된 세 꼬맹이들이 어떻게든 엄마를 도왔다. 모든 집안일이 아이들과 놀이가 되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행복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아이들만 보였다.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모를 고달픔 뒤에도 항상 일기를 쓰려고 하면 아이들과 즐거운 일만 떠 올랐다. 아이들의 귀여운 재잘거림만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만 만 내 맘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니 일기는 항상 행복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그때의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지난 모녀 일기 속에는 행복만 있다.
지난 시간은 고통보다는 행복의 기록이 많은 것 같다. 힘들다고 쓰면 더 힘들어 지니까 좋은 기억을 찾아서 쓰려고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십 수년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의 작은 메모들에는 즐거운 기억만 있다. 동료들과의 작은 이야기들 도 내 기억에는 나빴던 기억이 없다. 아무리 화가 났던 상황도 기록을 하려고 하면 다 용서되고 이해되니 나쁘게 기록을 할 수가 없다.
오랫동안 아꼈던 동료가 떠났다. 일에 대해서는 둘 다 욕심이 많던 터라 많이 부딪혔던 사람이다. 서로 숨김이 없이 터 놓고 싸우다가 합의점을 찾아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던 관계였다. 둘 다 성질은 불같아서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맞불이 붙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거의 7~8년 같이 일하면서 그만큼 잘 통하는 사람도 몇이 안 되었다.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내 맘은 정리가 된듯하다.
나도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분도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도 오지랖이 하늘을 찌르는데 나보다 더 인정이 많아서 그분의 오지랖은 태평양 같았다. 둘 다 욱하는 성질이 있음을 잘 알아서 서로 진정시켜주는 진정제가 되기도 하였다. 직장에서 씁쓸함을 같이 얘기할 수도 있던 손에 꼽던 사람이었다.
떠나고 나니 그립다. 있을 때 잘해줄걸. 있을 때 좀 더 많이 헤아려 줄걸 그랬다는 아쉬움이 있다. 생산직이란곳이 떠나면 다시 만나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특별한 관계가 아니고서야 퇴직 후에 연결고리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다들 사는 게 바쁜 일상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못 만나도 이해를 한다.
지금 내 곁에 귀한 사람들만 보이는데 결코 미화된 지금이 아니다. 아이들 어릴 때는 아이들 보는 내 눈이 행복했고, 지금이 귀한 이유는 내 곁에 귀한 사람들이 있어서이다. 난 이런 귀한 인연의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다소 미화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