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잘 안 보는 편이다
남자라서기 보다 조금 매만진다고 크게 달라질 게 없는 얼굴이다.
솔직히 가지런하고 단정한 머리를 해보면 왠지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 같다.
내가 봐도 불편하고 민망스럽다.
조금 부스스하고 살짝 들뜬 내추럴한 상태를 좋아한다. 물론 노숙자머리라고 한 소리를 듣는다.
머리도 허옇게 쇄서 염색을 하라고 잔소릴 듣는다. 하지만 이것도 무시한다.
거울에 이리저리 얼굴을 돌려보며 자신 있게 얘기한다.
"조지 클루니 같지 않아?"
얼굴이 오서방인데 어따가 갔다 대니...
머리를 짧게 치고 싶은 마음도 있는데 크기도 크기지만 얼굴이 곱상한 스타일이 아니라 참고 있다. 게다가 왼쪽 정수리에는 호랑이 발톱자국이 있다.
어릴 때는 개한테 물린 거니? 호랑이가 할퀸 거니 이런 소릴 많이 들었다
조금 커선 혹시 칼밥이나 도끼 스친 자리가 아닌가 별소릴 다 들었다.
제법 길게 난 흉터 자국의 비밀을 참 솔직히 어디 가서 이야기하기가 그렇다.
돌도 안 지난 갓난아이 때 생긴 상처다.
재떨이에 맞아서 머리가 깨졌다고 하는데 너무 어렸기에 난 당연 기억을 못 한다.
태어나자마자 조직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백일 지난 갓난애가 재떨이에 머리가 깨졌다는 것을 나 조차도 믿기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주위에 증언과 증거들이 있어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아니 꽤 한량 내지 건달스런 분이셨다.
개과천선을 한 듯 대학을 용케 졸업하시고 은행을 다니시다가 그만두셨다. 아마 당시 은행원들 봉급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60년대 초 중반 그 시절에 돈 많이 받는 직업이란 게 별반 없었을 거 같긴 한데 돈 쓸 걱정만 하고 살던 한량이 결혼을 하고 살다 보니 아마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신 듯하다.
한 덩치하고 힘이 있으니 선택을 하신 건지 그나마 그때는 쌀집이 돈벌이가 되었는지 쌀집을 차리셨다.
얼마 안 가고 아버지는 배달총각을 들이시고 어머니에게 가게를 맡기고 놀러 다시기 바빴다고 한다.
위에 누이가 하나 있고 간난 애도 봐야 되고 가게도 보다 보니 자주 옆집에 아주머니에게 나를 부탁하곤 했다고 한다.
강아지나 고양이나 새끼 때 통통한 것만큼 예쁜 게 없듯이 부끄럽지만 내가 조금 귀엽긴 했었다.
당시에는 우량아 선발대회라는 게 있었다.
아마 내가 머리를 다치지 않았더라면 그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태어났을 때 4.5kg로 나왔다고 한다.
누이 위에 형이 하나 있었는데 조산을 한 듯하다. 꼬치꼬치 물어볼 이야기는 아니지만 나일 먹고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그런 영향이 이었을까 남자 아기라는 확신이 드셨는지 너무 과하게 뱃속에서 키우셨던 것 같다.
홀딱 벘긴 아기 때 사진은 동네 사진관에 내가 중학생이 되어도 홍보용으로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애가 낼모레 장가갈 나인데 고만 좀 내리라고 하셔서 없어졌다.
그 사진관 앞을 지나면 저건 나야 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은커녕 가급적 돌아다녔다.
옆집 아주머니는 나를 많이 안아주고 예뻐해 주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집에는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아들이 하나 있었고 자기 엄마가 엄한 놈을 안아주고 얼르는 걸 보고 큰 충격과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것 같다.
잠깐 눕혀놓았던 나를 재떨이로 내리치는 만행을....
아버지는 슬리퍼 짝을 꿰어 신은 채 가까운 병원인 세브란스로 급히 들고 날랐다고 한다.
그런데 아마 아이가 너무 어렸기에 병원에서는 거부를 했다고 한다.
수술을 못한다고 하자 프로레슬러 같은 아버지가 병원을 뒤 집어 놓고 가져간 현찰을 던져 뿌리고 당장 해달라고 실랑이 끝에 수술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가 미쉐린타이어 같이 살이 찌니 수혈을 할 수가 없었다. 팔에 혈관을 찾을 수없고 다리를 봐도 안 보이고 어쩔 수 없이 발목 앞부분의 생살을 째고 혈관을 찾아서 수혈을 하고 머리를 열고 꿰매고...
어쨌든 그렇게 살아났다.
그 증표로 조그마한 명함만 한 진찰증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평생회원권이라 쓰여있던데 이거면 계속 공짜인가 소중히 간직했건만 그냥 종이쪼가리였다.
죽다 살아났으니 아이가 오래 살 거라고 주위에선 덕담 아닌 덕담으로 위로를 했다고 한다. 사실 은근히 나도 기대하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별 보채는 것도 없고 얌전한 아이로 자랐다고 한다.
머리수술 영향으로 다른 부위보다 머리가 빨리 자라고 좀 컸다. 그때 사진을 보면 다들 웃곤 한다.
날 때린 놈이 누구에여? 병원비는 받은 거에요? 내가 좀 더 크면 가서 복수해야 하는데 이런 이야길 하면 어머니는 멀리 이사 가서 모른다 그냥 웃으셨다.
아팠던 과거가 있는 아이로 크다 보니 집에선 먹는 거 가지고는 웬만하면 다 잘 챙겨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동네를 휘젓고 다녔는데 아버지 술자리를 쫓아다니며 실비집, 대폿집에 빈대떡과 돼지갈비도 잘 받아먹고 리어카로 오는 과일 장수 아저씨를 쫓아다니면서 흉내도 내고 사과도 얻어먹었다.
스피커도 없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 나보다 조금 작은 사과여, 개구쟁이 선물이여~" 재밌는 멘트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동네 국수집, 깨소금을 파는 집엘 가서 깨도 잘 얻어먹은 거 같다. 비쌌을 텐데 아주머니는 항상 이뻐하고 깨를 손으로 한 움큼씩 집어 먹도록 봐주셨다.
내가 주인집 아들이라고 잘해준 건가 보다. 아니면 내가 많이 귀여워서 그랬나 그렇게만 생각을 했다. 이사를 가셨어도 한동안 신촌입구까지 부러 명절에 인사도 다니고 그랬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아주머니 혼자 계실 때 한 두어 번 인사를 간 후 연락이 끊겼다.
문득 그 자릴 지나다 생각을 해보니 혹시 깨소금을 주시던 아주머니네 작은형이 나를 내려친 범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퍼뜩 들기도 했었다.
나의 인생의 비밀이 풀어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지만 확인할 수도 확인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깨소금 아주머님은 어머니보다 한참 연상이셨으니 돌아가셨을 거 같다.
내가 수없이 집어 먹은 깨소금으로 아마 보상을 다 받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