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잔소리

by 승환

잔소리

비가 내리는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들어간다.

집안에 인기척이 없고 왠지 느낌이 싸하다. 무엇인지 모를 공포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고 뚱한 표정의 아내가 들어오는 나를 본체만체한다.

난 아무리 생각해 봐도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눈치를 살핀다.


집에 들어오자 보이는 것은 구석에 큰 박스가 배를 깐 채 풀어져서 포장지와 함께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무엇인가를 또 산듯하여 살펴보니 유리병이 사이즈 별로 키가 크고 낮은 여러 개가 풀어져 있었다,

유리병은 물에 젖은 채 스티커 라벨을 떼고 한 번 닦아 놓으려고 하다 미처 다 못한 듯했다.

화가 난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내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손이 빠르지도 않고 후딱후딱 해치우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었다.

혼자 하기 버거운 일이 있을 때 나의 부재가 아쉽고 야속하다고 생각한 것일 거다.

내가 사라고 한 게 아니고 산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나는 천하에 무정하고 자기 좋은 것만 쫓아다니는 불성실한 남편이 되어버렸다.

내가 가정에 소홀하였다고 누가 말한다면 좀 억울한 것이다

제 할 것은 하였고, 내 나름대로 눈치가 보여 집안일이고 더 하면 더 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 쏘다니며 음주가무를 하는 것도 아니요, 집에 돈을 가져다 허투루 낭비하는 것도 아니다.

늦은 나이에 철이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잘못이라면 좀 억울하다 생각이 들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이 맞는 것인지 혹시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맞는 것인지 슬며시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짓은 아닌 것 같은데 이쁜 짓은 아니었다.

요즘은 거의 매일 저녁 나는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없던 향학열이 불이 붙더니 지금 집채 만큼 불길이 올라 타오르기 시작했다.

월요일은 쉬는 반나절에 이화동을 가고 화요일에 충무로나 잠실로 수요일에 응암동과 용산에 목요일에는 망원동에 수시로 비는 날에 뭔 북토크니 뭐니 일이 파하면 저녁이 더 바쁜 생활이 되었다.

심사가 뒤틀린 아내는 또 한마디를 한다.

도대체가 젊어서는 뭘 하고 싱싱할 때는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술 먹고 다니다가 이제 다 늦게 무슨 공부냐며 힐난한다.

어째 하는 거마다 욕심만 않아서 too much라고 하는데 속으로 울컥 화가 났다.

속으로 고까운 마음을 누르고 일부러 엉너리도 치고 아내의 기분을 맞춘다고 허허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못 참고 몇 마디 했겠지만, 오늘은 그냥 웃으며 참았다. 아니 참아졌다.

사실 젊어서 성격 안 좋고 욱하는 거로 나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집안 내력이겠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는 한 고집과 성격으로 근방에 유명하신 분이었다.

덩치도 덩치지만 고수머리에 옥니, 그리고 뱁새눈까지 세 가지 콤보를 얼굴에 담고 다니셨으니 사람들은 알아서 싸움이나 다툼을 피했다.

그런 걸 물려받은 나도 늘 지지 않으려 고집을 부렸고 뭐 하다 안되면 제 성질에 못 이겨 난리를 치곤했다.

오죽했으면 당신은 고집도 의심도 투머치라 똥인지 된장인지도 남들 한번 찍을 것을 서너번 찍어보는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런 내게도 천적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내였다.

전형적인 강강약약의 투사 같은 성격의 아내는 나의 허장성세에 조금도 겁을 먹지 않았다,

옆에서 끊임없는 잔소리를 하였고 결코 타협이나 용납은 허락하지 않았다.

아 좀, 남자한테 져주면 안 되는지 남들은 어찌 사는지 나만 힘든지 고민이 많았다. 혹시 아내는 크산테스 같은 악처가 아닐까 나는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가 될 운명인가? 그런 마음이 가득했으니, 아내가 꼴 보기 싫고 미울 때가 많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나 한테 싫은 소리를 해준 사람이 아내뿐이었다.

굳이 성격 더러운 이와 드잡이질 하기 싫어 사람들은 피한 것을 나는 내가 잘난 줄만 알았다.

네네 거리는 달콤한 말만 하는 아내들보다 쟁쟁거리는 아내의 잔소리, 그것이 처음에는 듣기 싫어도 다 도움이 되었다.

나이를 먹어가니 철이 들고 그 잔소리의 깊은 속마음도 알게 되고 아무도 거들도 보지 않은 늙은 남자를 챙겨주는 이를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제법 둥글둥글해져서 사람 만들어 놓았더니 밖으로 돈다고 걱정하는 아내에게 조금은 더 같이 보내는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아내가 무서워서, 잔소리가 싫어서 참는 것 보다는 고마워서 감복할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