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의 책이 희랍어 시간이 선정되어서 다시 읽었다.
두 번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아직도 소설 전체적인 것들이 선명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나온 중동태의 고대그리스어의 단어가 머리에 들어가서 콕 박힌 후 지워지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결정적적인 증거품이나 해결키를 말해준 듯해서 그곳에서만 계속 맴돌다 보면 소설이 끝난다.
물론 그냥 끝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 전체의 줄거리와 내용은 사실 별다른 것은 없다 다이내믹한 반전이나 별다른 이야기는 아니다
작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특별한 경험을 한 이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새롭고 못 보던 사람들은 아니다.
극 T이고 I인 내가 보기엔 그랬다
줄거리만 이야길 하다 보면 심봉사가 끝내 눈을 뜨지 못하고 백치아다다는 살아남아 둘이 만나서 서로 의지하며 삶의 희망을 이어간다는 내용이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모임에서 했다가 야유 소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느낌은 그랬다.
개개의 캐릭터와 인물은 현실에서 더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의 고비를 넘어온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이야기로 끝난다. 그냥 가십처럼 웹툰 한 꼭지처럼 한 번 보고 듣고 마음을 조금 울렸다가 이내 사그라든다.
한강소설에서는 왜 어찌 보면 시시한 이야기 또는 진부한 스토리가 크고 깊고 또 오래 우리를 울리는 것일까 좀처럼 알듯 말 듯 아리송하기만 하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음식의 거부를 희랍어 시간에서는 말을 잃어가는 실어증을 가진 주인공이 나온다. 채식을 하고 실어증에 걸린 것은 사고처럼 피동의 모습인 듯 하지만 능동의 선택이다.
스스로 단절과 고립을 선택하는 과정은 어찌 되었든 감추어진 능동이고 그것도 강렬한 능동이며 의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을 고대그리스어의 중동태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상징을 끌어낸 것은 작가의 사유와 감성이 남다른 것이고 우리는 여기에서 또 탄복을 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고립과 단절을 당했다고 걱정을 하고 수동, 피동의 삶을 걱정하며 거기에서 나오기를 바라며 걱정을 한다.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어떤 것들은 대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용납받지 못한다.
능동의 의미가 감추어진 미래의 능동으로 향해 열려있는 중동태의 용법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기대고 꿈꾸어보는 희망을 찾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 무리를 짓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일은 학습의 산물이다. 약속된 기호와 신호를 전달하는 언어를 배우고 그것을 사용하여만 한다.
고대부터 근 현대를 지나오면서 단어들과 사용법은 따라서 변화해 가고 좀 더 세분화되어 간다.
지식과 생각을 주고받는 것에 좀 더 세밀해지고 사회상이 반영된 의미와 용법이 달라진다.
산업화와 상업이 발달되기 전에는 없던 영어의 HAVE는 더 많이 사용이 되는 예를 들기도 한다. 소유가 중요치 않았던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달라지고 우리는 좀 더 많이 소유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마음을 얻는 일은 산다는 말로도 많이 쓰이는 시대가 되었고 사람들은 필요해의 해 단어를 신조하기도 하고 없던 의미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그런데 실상은 단어와 말이라는 것은 생명을 얻은 후에는 거꾸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스스로 입을 닫은 의도적인 여자의 단절과 불가항력적으로 시력을 잃어가고 세상과 단절이 되어가는 남자를 만나게 하는 일은 테드창의 네인생의 이야기(영화의 컨택트)를 떠올리게 한다.
도저히 소통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의 만남의 과정을 그려간다.
각각의 주인공은 삼인칭과 일인칭의 화법으로 극단적으로 배제된 감각을 빼고 시각으로 청각으로 소설을 채워 가고 있다.
언어와 관계 소통 그리고 결핍 존재론적인 고민들은 퍼즐의 하나하나가 되어서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다가 하나씩 주워 들고 그림이 맞춰진다.
열린 결말이라고 하지만 한강 작가는 해법을 이미 조금씩 녹여서 찬찬히 우리에게 보여줬다.
한강작가는 소설가이지만 나는 시인이라고 생각이 든다. 소설을 빌린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지지부진하고 시시한 스토리라도 작가의 묘사와 비유와 너무도 세밀한 작업으로 글 속에 빠지게 만든다. 어떤 장치로서 상징으로 무엇이 있지 않을까 탐닉하게 만든다.
어떤 소설가는 데생을 하듯 가끔은 색연필로 색을 입히더라도 후딱후딱 그림을 그리고 전체를 이끌어가는 것 같은데 한강작가는 극 사실화를 그리는 화가와 같다. 연필이나 볼펜이 아닌 파스텔을 하나씩 뭉개가며 실사와 같은 풍경을 몽환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 길고 지리한 그림을 채색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결말의 끝에 다 달아서 이미 작가에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가 상징하고 비유한 것 깔아 놓은 밑밥들을 하나씩 되씹으면서 이제는 작가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돌고 돌아와서 한 이야기는 말을 하지 않고 보지 않고 우리는 소통할 수 있고 유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생각을 했다.
거친 쌍욕보다 서슬 퍼런 경멸의 눈빛이 더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고 사랑한다는 달콤한 노래보다 어루만지고 부둥킨 살과 살이 맞닿은 곳에서 신뢰와 애정이 꿈 튼다.
단절과 결핍 고립을 안고서 살아야 한다면 지옥 같은 세상일지도 모른다. 우리 포유류의 종특은 부대끼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도하고 희망하고 행복을 느낀다.
선택적 함묵증을 가진 아이에게는 말을 틔우는 일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 자체로 떠는 다리나 꼬불인 손가락을 보며 인정하고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 바라봐 주는 것 누군가의 눈길과 관심은 마음을 여는 첩경이 된다. 더 나아가 보살핌과 이타의 손길은 받는 것뿐 아니라 주는 이들에게 구원이고 행복이다
이런 주제는 아닐까?
말이 넘쳐나는 세상과 보이는 것이 홍수인 세상에서 진정한 소통과 인생의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언어보다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닿아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우린 아직 잃어버리진 않았는지 찾아가는 여정에서 인생을 생각할 것.
나의 감상은 치우치고 오해일 수 있지만 해석이 좋으면 꿈이 좋은 것이라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