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군복무 중에 책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알게 되었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알게 된 순간 너무나 행복했다. 나는 칸트의 정언명령 내용을 구구절절 받아들였다.
(이전 글 :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기] https://blog.naver.com/naljh5872/222600489957)
칸트는 보편적 윤리 의식을 추구하며 정언명령을 추구했다고 한다. 칸트가 한 말을 풀어보면, 첫째로 자신이 하는 행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되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였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윤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은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존중하며 대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행동이어야 한다.
군대에 있었을 때 이 내용을 읽고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내가 군대 선임들에게 느꼈던 불편함의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군복무를 할 당시, 몇몇 선임들은 후임들이 '재미'의 원천으로서 후임들을 수단화하고 있었다. 후임들을 '목적'으로 대하는 척도 했지만 사실상 수단화하는 느낌이 너무 커서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그 불편함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을 수단화 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내 사회 속에서 느꼈던 불편함들의 원인 또한 알게 되었다. 돈으로 사람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 돈이면 다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묘한 불편함들을 느꼈다. 그 이유도 돈으로 사람을 수단화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성매매에 느꼈던 오묘한 불편함의 이유도 깨달았다. 성매매는 사람을 돈으로 사서 성욕을 푸는 것이었다. 사람을 성욕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칸트 덕분에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다. 철학, 언어학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바로 칸트의 정언명령을 체화했다. 나는 항상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고자 노력했다. 사람들을 대할 때 내 생각/말/행동이 누구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행동했다. 친한 친구들에게 바라는 것 없이 목적으로 대하며 잘해주려고 하고, 내 생각/말/행동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했다.
그리고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거리를 두었다.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었다.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들, 나만 연락하고 상대방은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아마 나만 좋아한 걸수도,,) 등 불편한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었다. 불친절한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었다. 카페, 헬스장 등 서비스를 이용하는 곳에서 불친절한 종업원 분들께 따지기도 하고 거리를 두었다. 상대방의 행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문화규범이라는 것이 있고, 한두번 불친절한 것을 넘어 선을 많이 넘는 경우에 적극적으로 컴플레인을 걸었다. 그리고 성소수자 혐오발언, 장애인 혐오발언, 여성 혐오발언 하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거리를 두었다. 저런 사람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판단이 있었다.
이렇게 칸트의 정언명령을 적용하며 살다보니, 사람에게 스트레스 받는 경우가 많았다. 뭐 물론 칸트 정언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인간관계가 어렵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책에서 읽은 소량의 어줍잖은 지식으로 나는 논리적-합리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래도 신기하게도 나의 외향적 성격덕분인지 언제나 내 주변에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이번에 불교 경전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무주상보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 무주상보시의 핵심 내용은 '내가 상대방에게 바라면서 행동하지 마라'였다. 수업을 들어보니 사람들은 늘 바라면서 행동하고 있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들은 자식이 성공해서 부모님들에게 잘해주기를 원해하고 있었고, 잘해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과외를 하면서 아이들이 한번에 다 이해하고 외워주기를 원해하고 있었고, 이해하지 못하고 외우지 못하면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무주상보시] 원리에 따라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들을 생각해보았다. 친구들, 부모님, 지인들, 직장 동료들 등등. 생각해보니 내가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참 바라는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목적으로 대하되 수단으로 대하지 않기를 바라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서로 친절하고 상냥하기를 바라하며 행동하고 있었다. 만약 사람들이 내 바람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나 '저런 사람이 다있네 ㅉㅉ'라는 생각보다는, '대명천지에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저럴 수는 없지!'라는 생각을 하며 상대방이 시정되도록 노력하거나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가치관으로 인해 내가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100% 옳았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이 그런 것이었고, 혹은 누가 이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여도 나는 수용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논리가 철저하지도 못했고 근거도 부족했다. 하지만 논리도 철저하고 근거도 철저한 [무주상보시]를 맞딱뜨렸다. 나는 곧바로 설득되었다. 수용되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많았구나. 내가 이것에 스트레스 받고 있었구나.
[무주상보시]를 알게 된 후, 나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낮추게 되었다. 불친절한 사람을 보면 '그래 인간들에게 뭘 바라냐'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 받지 않게 되었다. (아 물론, 여러 번 그런다면 지혜롭게 따질 것이다.) 나를 필요할 때만 찾는 친구를 보면서도 '그래 인간들에게 뭘 바라냐'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었다. (아 물론, 비윤리성이 계속 느껴지고 나에게 좋지 않은 불똥이라도 튄다면 지혜롭게 따질 것이다.) 직장 동료에게 스트레스 받을 때도 '그래 닝겐들에게 뭘 바라냐라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칸트의 정언명령을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언명령은 나의 인생에서 천지개벽 같은 느낌이었다. 모세의 기적과도 같았다. 무지의 바다를 갈라버리고 나의 불편함의 원인을 언어적-관념적으로 알려주었다. 칸트가 말한 윤리공화국 건설에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시적 측면에서 볼 때 정언명령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미시적 측면에서 볼 때 나는 나 스스로 괴로움을 자초하고 있었다. 이를 [무주상보시]가 가르쳐주었다. [무주상보시]를 이해하고 나는 내가 사람들을 볼 때 갖는 윤리적 기준을 낮추게 되었다. 나도 중생이고 저 새끼도 중생인데 뭐하러 중생들에게 기대를 걸었나 싶었다. [무주상보시] 원리에 입각해 괴로움을 낮추되, 지혜롭게 윤리적인 생활을 권하고 행하면 되는 것으로 보였다.
예전에 어떤 공학 전공자 분이 불교 수업을 듣고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분은 '불교 철학이 서양 근대 철학을 씹어먹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에 기함했다. 하지만 나 또한 이번에 느꼈다. 현대 민주주의의 기틀을 만든 서양 근대 철학도 위대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불교 철학이 더 씹어먹는 것 같다. 서양 윤리학에 심취해서(or 오해해서?) 괴로움 속에서 살다가 불교 철학을 만나니 깨달음이 왔다. 독립성, 자아, 주체, 계몽주의보다 공, 무아, 열반이 최고인 것 같다. 불교 짱짱.
*** 위 내용은 칸트의 정언명령과 무주상보시를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관련 전공자가 아니며, 개인적으로 이해한 내용이므로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 유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