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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 Aug 11. 2022

우리는 왜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가

대승불교 경전 [금강경金剛經]을 바탕으로

  불교 단체 [정토회]에서 정토경전대학을 수강한지 5개월이 되었다. 벌써 경전대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는 경전대학에서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불경인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했다.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천주교 신자였다. 하지만 천주교는 무조건적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말했다. 성인이 된 이후, 나는 논리적인 이해과정 없이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천주교에 회의적이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도 어려운데 왜 내가 남을 사랑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작년부터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것을 그만 두고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난 학기에 정토회에서 정토불교대학에 등록해 불교의 전반적인 내용을 공부하고, 이번 학기에는 경전대학에 등록해 금강경, 반야심경을 공부했다.


  경전대학을 다니면서 나는 다시 성당 미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사람들이 왜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너무나 논리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금강경을 공부하고 아가페적 사랑(부모님이 자녀를 사랑하듯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종하게 되어서 성당을 다시 다니고 있다.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성당에서 신부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들이 갑자기 와닿기 시작했다. 불과 2년전까지만 해도 '그냥 올바른 소리구만~'하고 집중이 되지 않던 이야기들이 모두 와닿기 시작했다.


  이번 글에서는 금강경에서 배운 글귀들을 바탕으로,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지 이해한 바를 토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1.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


  금강경 내용 중, 부처님의 제자 수보리는 부처님께 '해탈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내야 하는지'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부처님은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我皆令入無餘涅槃 而滅度之"라는 말을 한다. 이는 "내가 모든 중생을 열반(해탈)에 들게 제도하리라."라는 마음을 내야한다고 말한 것이라고 한다.


  나 자신이 모든 괴로움+속박에서 해탈하고 싶은 상황에서, 왜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열반에 오르도록 마음을 내야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스님은 절에 자주 오시던 어떤 중년 여성 분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여성 분께서는 남편이 매일 술 먹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 받아하고 있었다. 스님은 여성에게 남편을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내라고 권했다. 남편이 어린 시절 어떻게 자랐고, 남편이 직장 생활을 할 때 어떤 점을 힘들어하고 있으며, 남편이 술을 먹을 때 어떻게 스트레스가 풀리는 지 알아보라고 권했다. 그리고 남편이 술을 마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남편에게 술이 보약이다'라고 생각을 고치고, 남편이 더 행복할 수 있도록 해장국을 준비하든지, 같이 술을 마시든지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여성 분이 스님의 말을 들은 후, 힘겹지만 스님의 말대로 해보니 시간이 지나고 부부관계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나는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결국 해탈의 핵심은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고, 사랑한다', '타인에게 부모님들과 같은 마음을 낸다'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알게 되었다. 화내면 상대방도 나도 마이너스(-)이다. 하지만 아무리 싫어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한다면, 상대방도 나도 플러스(+)이다.


  이 깨달음을 얻은 뒤로 나 또한 타인을 사랑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특히나 선을 넘는 사람들, 싫어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고, 사랑하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내가 사는 집에서 윗집이 다소 시끄러운 편이다. 내가 사는 곳이 대학가 원룸촌이다보니 방음이 잘 안되기도 하지만, 윗집 분은 새벽 3시에 빨래를 돌리기도 하고, 새벽 1시에 줄넘기를 하기도 했다. 친구들 데려오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도 종종 들리기도 했다.


  한두번도 아니고 나는 화가 나서 집주인 아저씨께 여러 번 말씀드렸다. 집주인 아저씨는 윗집 분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데, 새벽 2시에 세탁기 퉁퉁퉁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화가 났다. 그러다가 일체유심조(모든 괴로움, 감정은 내 마음이 일으킨다)를 깨달았던 자랑스러운 불교대학-경전대학 학생으로서 일체유심조를 적용해보기로 결심했다.


  윗집 분은 20대 남성, 대학생으로 보였다. 나 또한 대학생 때 너무 학교 생활, 친구들이 좋았던 나머지 방에서 시끄럽게 놀고 항의를 받았던 적이 굉장히 많았다. '윗집 대학생 분께서도 대학생으로서 얼마나 놀고 싶었을까', '시간이 나지 않아서 밤에 빨래를 하는 것 같다', '나도 불과 5년 전에 저 윗집 분과 비슷했지. 내가 내 업보를 받나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일체유심조의 효과로 놀랍게도 윗집이 시끄러워도 이제는 크게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소음이 들려올 때마다 윗집 분께서 즐겁게 대학생활을 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즐거워졌다. 이렇게 윗집도 아랫집도 즐거운 마음을 내게 되었다(?). 이것이 부모님 같은 마음을 내어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고, 사랑하여 나 자신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해탈-열반에 오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2.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


  금강경 내용 중에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는 "상相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보시는 일종의 기부를 가리킨다. 성당에서는 헌금을 내고, 사회에서는 기부를 하는 것을 절에서는 '보시'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보시는 비단 절 내부의 기부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에서 기부하는 활동, 내가 누군가 돕는 자원봉사활동 등도 포함한다.


  상相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고정관념들을 가리킨다. 아상我相(나라는 사람이 존재한다), 인상人相(나, 너라는 사람이 구별되어 존재한다), 중생상衆生相(생명을 가진 것만 중요하다는 생각), 수자상壽者相(존재하는 것만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법상法相(규칙, 규정, 법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 등 사람들이 구별짓고, 절대화하는 모든 생각들을 가리켜 상相이라고 부른다. (불교는 이 상相을 해체하려고 한다. 상相을 해체한 것을 공空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단지 원자와 진공의 결합이지 않는가? 우리 스스로 의미부여를 할 뿐.)


  스님은 무주상보시를 말하며 어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어떤 어머니께서 아들 둘이 있었는데, 모두 공부도 잘하고 너무 잘 컸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가게 일을 해서 아들들을 다 잘 키운 결과, 두 아들 두 미국에 가서 유학을 갔고 미국에 정착해서 가족도 꾸리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국에 있었고, 모든 어머니 친구들이 입이 닳도록 아들들과 아들을 키운 어머니를 칭찬했다고 한다. 친구들도 그렇고 아들들도 그렇고 다들 어머니께서 일을 그만하고 미국에 와서 편하게 쉬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아들들과 함께 살려고 미국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왠걸, 어머니께서는 소외감을 느끼셨다. 이웃들은 영어를 해서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아들들은 자기 본업 하기 바쁘고 가족들 챙기기 바빠서 어머니를 경제적으로는 챙겨도 정서적으로는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는 외롭고, 아들들에게 미운 감정과 화나는 감정이 치솟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절에 가서 매일매일 108배를 했다고 한다. 집에 들어가면 자신과 말하는 시간도 얼마 가져주지 않는 아들들이 너무 밉고 화나서 절에서 108배라도 해야 분성이 가라앉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 어머니를 보며 '아들들에게 바라는 것을 갖고 키웠다'라고 진단했다. 부모님들 누구나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 없이 키웠다고 말하지만, 막상 자녀들이 크면 이것저것 해주길 바래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스님도 어머니께서 바라는 것이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생판 모르는 남이 생활비 주는 것도 아닌데 아들에게 고마워해야한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스님은 어머니가 아들들을 보며 '저 놈은 남이다!!!'라고 계속 외우길 권했다.


  시간이 흐르고, 놀랍게도 어머니는 괴로움이 사라졌다고 한다. 스님과 만난 후 아들들을 볼 때마다 화와 짜증이 올라왔지만 '저 놈은 남이다!!!'라고 생각하니 남이 돈도 주고 밥도 주고 잘 곳도 주는 등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라는 관념, 부모-자식 관계라는 상相을 떨치니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 것이었다.


  스님은 어머니 이야기를 마치며, 무루복(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행동했을 때 짓는 복)이 한량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생들은 기부를 할 때도 항상 나 혹은 누군가에게 바라는 마음을 갖곤 한다고 말하셨다.



  스님의 강의를 듣고 너무 신기해서 나 또한 무주상보시를 실천해보았다. 당근마켓에 내가 더 이상 쓰지 않는 전공책들, 자격증 서적들을 나눔했다. 이 중에는 내가 피와 땀을 흘리며 알바를 하고 구매해서 애지중지 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과감히 나눔했다. 내가 나눔한 물건을 도로 갖다 팔아도 '생활비에 충당하려나 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눔 받았던 분들이 정말 너무나 감사해하셨다. 나눔 받으셨던 어떤 분은 심지어 나에게 스타벅스 기프티콘까지 주셨다. 다른 어떤 분은 나눔하고 다음 날에 '너무 감사드린다'라는 감사인사를 재차하셨다. 너무 신기했다. 이렇게 바라는 마음 없이 사람들에게 무주상보시를 하니까, 정말 한량없는 복덕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스타벅스를 잘 가지 않는 편이다.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스벅 기프티콘 필요없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지인이 이 또한 당근마켓에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지 추천해주었다. 오.. 이 또한 당근마켓에 나누었다. 나눔 글을 올린지 5초만에 나눔되었다. 이렇게 또 한량없는 복덕을 만들어보았다.


  문득 무주상보시, 무루복을 행하면서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이 떠올랐다. [사랑의 기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 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아니며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중략)...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준다는 것은 부자임을 의미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다. 많이 '주는' 자가 부자이다.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안달을 하는 자는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무리 많이 갖고 있더라도 가난한 사람, 가난해진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자로서 자신을 경험한다.

*출처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2020년 5판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어쩌면 바라는 것 없이 타인들에게 기부하거나 행동을 하는 등 '일종의 주는 행위'를 하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한량없는 복덕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생각했다.



3.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


  금강경에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 글귀의 뜻은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라고 한다. 여기서 허망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허망은 영원한 것도 없고,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我라고 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불교에서 늘 말하는 무아無我(나라고 할 것이 없다), 무상無常(항상 고정된 것이 없다)라는 말이다.


  반야심경에도 비슷한 글귀가 있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이 글귀는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으며 공空은 색色과 다르지 않고, 색色이 곧 공空이며 공空이 곧 색色이다."라는 뜻이다. 색色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혹은 물질/물체들을 가리킨다. 공空은 사실 모두 고정된 것은 없다는 말이다. 공空은 무無가 아니다. 없다(무無)는 것은 있다(유有)를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공空은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초월한 개념이다.


  스님은 강의들에서 이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설명해주셨다. 사실 우리는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항상 변한다. 우리 몸에는 세포의 죽음과 탄생生滅이 반복되고 있다. 성인이 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화가 진행된다. 더불어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 또한 모두 사실 공空하다. 아무리 화가 많이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화가 줄어든다. 그리고 같은 문제여도 누군가는 화가 나지만 누군가는 '그냥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간다. 고정관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유럽인 등 국가와 문화별로 가지고 있는 상相이 다르다.


  하지만 이 상相과 공空이 제일 몸소 체화하기가 어렵다. 논리적으로 이해가긴 한다. 우리는 모두 문화적으로-사회적으로 학습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매일 노화된다. 언젠가 죽는다. 머리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매일매일을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몸으로 느끼기 어렵다.



  그러다 문득 책을 읽다가 이 공空을 두 줄로 확 와닿게 하는 문구를 발견했다. 최근에 물리학 관련 대중 서적 [우주를 만지다]를 읽는데 데모크리토스라는 고대 학자 曰,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진공 뿐. 그 밖에 모든 것은 상상이다."라는 구절을 발견했다.


  나는 이 두 문장이 바로 공空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원자와 진공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물과 식물은 지구별에서 원자와 진공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유기체 생물이다. 생물은 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루소가 그의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말했듯이, 인간들은 모여 살게 되면서 서로 비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로 아름다움/추함, 많고 적음, 키 크다와 작다 등 관념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런 상대적인 가치로 괴로움을 자아내곤 한다. 또한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겪으며 상대방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사실은 원자와 진공의 결합일 뿐이고, 건강하기만 하고 몸 편찮지만 않아도 행복한 것인데 자기가 만들어낸 자의식으로 스스로 괴로움을 자아내곤 한다.



  원자와 진공의 결합이라는 사실이 사랑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채롭다. 적어도 내가 느꼈던 점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점을 푼다면,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연민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효대사는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거은 괴로움이요. 죽지 말지어다. 태어나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말하며 생사고生死苦를 말했다고 한다. 자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은 태어난 이상 갖가지 마음을 내며 괴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스님이나 부처라고 해도 화가 나거나 슬픔을 느끼는 등 감정적인 동요가 있다고 한다. 단, 그 동요가 적을 뿐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는 서비스업 종사자,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져서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 사람들, 타인에게 몹쓸 짓을 한 강력 범죄자, 자신의 권위를 마음껏 뽐내고 싶은 사람들,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로 사람들을 하대하는 사람들 등 모두 자기 자신 혹은 타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었다. 모두 원자와 진공의 결합들임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리고 진상, 범죄자 등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포용하고, 사랑할 때 자신의 괴로움은 소멸한다고 한다.





  정토불교경전대학에서 가장 울림있게 배웠던 내용들을 언급해보았다. 나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새로 태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원자와 진공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감정과 괴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인간관계든 사회생활이든 사실상 거래관계를 맺고 있었다. 나는 나눔을 많이 해본 경험이 없었다. 내가 바라는 것 없이 사람들에게 기부/후원/나눔 했을 때 그 복이 큰 것임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나 또한 자원봉사로든 기부로든 적극적으로 나눔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또한 싫어하는 사람, 불편한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스트레스 받으면 내 손해이다.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면 상대방도 나도 +가 된다. 싫어하면 상대방도 나도 -가 된다.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도 '저런 놈 나니까 받아준다'라는 마음을 내니까 받아주는 것이 즐거워졌다. 물론 혹자는 '내가 어디까지 받아줘야해', '지친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또한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라는 생각에 의한 것이다. 원자와 진공의 결합인데 자의식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나 또한 자의식이 커서 갈 길이 멀다..)


  정리하자면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다시 성당에 가기 시작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예수와 부처가 되는 길은 어렵다고 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남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 이 글은 필자가 정토경전대학에서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틀리거나 오해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불경 및 불교 교리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은 전문가의 자료를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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