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공양과 애국자 되는 법

《내 인생의 포인트 찾기》〈8화, 미지의 세계, 카투사가 되다(2-2)〉

by 샤인




카투사 근무 장점은 여러 가지다.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크다. 관심이 있으면 얼마든지 영어 실력을 향상할 수 있다. 초등학교 때 해외 펜팔을 경험했던 나는 이후로 잘은 못 했지만, 영어에 꾸준한 흥미가 있었다. 아직도 영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카투사 근무의 영향이 크다.


둘째는 병영시설이다. 배럭(Barracks)이라 불리는 막사에는 미군 2명과 카투사 1명이 한방을 썼다. 개인 침대와 옷장, 서랍장, 공동 냉장고가 있고, 세탁실에는 80년대 초 우리 가정에서도 보기 드물었던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었다. 물론 공동샤워장에는 24시간 온수가 나오고 휴게실에는 포켓 당구대와 음료와 담배자판기가 있었다. 막사 내 개인 공간은 정기적으로 스스로 청소했지만, 공용공간은 청소를 담당하는 군속 아저씨(일명 하우스 보이)가 따로 있었고, 그분에게 일정 금액을 주면 군화도 닦아 주었다. 영내에는 영화관, PX, 체육관, 수영장, 볼링장, 레크리에이션 센터, 클럽 골프장까지 있었다.


세 번째는 일과시간 이후 자유로움이다. 그때에도 근무 시간은 9시부터 5시까지(우리보다 1시간이 짧음)였고, 주 5일 근무제였다. 추미애 전 장관의 아들처럼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복귀시간만 준수하면 업무시간 이후에는 사복으로 갈아입고 외출·외박이 가능했다. 주말에는 외부인의 배럭 출입도 에스코트만 하면 자유로웠다. 카투사들에게도 가족이나 친구들의 면회가 자유로웠다. 거기에다 우리 공휴일은 물론 미국 국경일에도 쉴 수 있다.






불편함도 없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나라는 그리 내세울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주한미군으로 오는 병사들도 우리와 비교할 때 수준 이하의 병사들도 많았다. 나라 형편이 그러니 이들이 한국과 한국인을 보는 시각이 편향적이었다. 말투와 행동에서 하대가 느껴지고, 그들의 행동에서 한국인(특히 여대생)을 쉽게 보는 풍조가 만연했었다.


그렇게 좋았던 양식도 세끼를 모두 먹으니 질렸다. 배부른 소리라 할지 몰라도 해외여행을 나가 며칠만 한식을 먹지 못해도 김치가 그리운데, 삼시 세끼 계속 양식만 먹으면 얼마나 질리겠는가? 그렇다고 매주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올 수는 없는 일.


portuguese-gravity-Gj0imgIk-qo-unsplash.jpg Unsplash의Portuguese Gravity


첫 외박을 나가자 부모님과 형제들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환영했다. “김치 먹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냐?”“군대 생활은 어렵지 않으냐?”며 진수성찬을 차려줬다. 그것도 몇 번. 올 때마다 생일상을 차려주고 없는 살림에 용돈 주기가 쉽지 않은 터. 반김의 강도가 점점 약해졌다. 매번 집에 오는 것이 부담되지만, 김치와 밥은 뗄 수 없는 주말의 유혹이었다.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우선 친척 집을 순회하는 것이다. 장안동에 있던 숙모님 댁을 제일 많이 갔던 것 같다. 염치 불고하고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갔던 것 같다. 서울 사는 고모 댁에도 가끔 갔었다. 강서구에 사는 사촌 송ㅇㅇ 형님 댁에도 자주 갔는데, 형수님과 조카들이 유독 반겨주셨던 기억이다. 말씀은 안 하셔도, ‘양식 공양’ 기회를 주신 것도 이 형님의 덕으로 알고 있다. 집도, 가까운 친척 집도 가기가 그러면 친가 외가를 막론하고 안면이 있는 먼 친척까지 찾아다니며 ‘문전걸식’ 했다. ‘김치 공양’을 해주신 그분들께 감사하다.

해외에 나가면 우리나라 음식이 그립고, 시키지 않아도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2년 5개월의 카투사 생활을 통해 나라의 소중함과, 나라도 개인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기회가 된다면 카투사 근무를 권한다. 젊은 시기 투철한 국가관을 절실하게 느낄 기회다. 손자 이후 세대 언젠가는 없어질 의무복무 제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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