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달려라 아비(2024), 창비
"소설가 김애란은 타고난 글쟁이다. 그의 소설 몇 페이지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단어의 배치, 리듬감이 남다르다. 좋은 몸통을 타고난 세기의 테너 카루소나 파바로티처럼, 그의 글에는 타고난 재주의 편린이 묻어있다." 연합뉴스 송광호 기자의 인터뷰 기사(2023.11.03)의 내용의 일부다.
20대 초반에 통통 튀는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쓰다니. 2005년 창비에서 처음 펴낸 그의 첫번 째 소설집 『달려라 아비』. 초판 40쇄, 개정판 10쇄를 발간한 스테디셀러다.
소설집은 9편의 단편으로 구성돼 있다. 다섯 편에는 아비가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나머지는 그녀들의 이야기다. 금상에 첨화는 김동식 문학평론가의 해설이다. 어찌 보면『달려라 아비』는 본 적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무한 변주곡이다.
자기 계발서를 읽는 때 주로 치던 밑줄을 소설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이 치기는 처음이다. 곳곳에 필사해두고 싶은 행동과 심리 묘사가 도드라져있다.
"포식자의 눈은 사냥을 돕기 위해 주로 정면을 향해 있고, 피식자의 눈은 포식자의 위치를 잘 감지해 도망칠 수 있도록 옆에 붙어 있다.(112쪽) "는 표현과 "물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행복한 가족인지 아닌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함께 수족관에 오는 가족이라면 당연히 행복한 가족일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처럼 피사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섬세하면서도 예리하지 않은가?
그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을 쓰는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소설의 편 편마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심리를 적나라하게 묘사헀다. 육상과 수중 동물의 먹이사슬을 생각해 볼 때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생김새를 '눈의 위치'를 가지고 이처럼 단박에 표현할 수 있을까? 수족관 나들이 가족에 대한 아쿠아리스트의 시각적 표현도 근사하다.
"그녀가 화장을 끝내기까지 잠들기 위한 과정만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피부를 안정시켜 주고 모공을 확장시켜 주는 스킨을 바른다. 수분과 유분을 공급해 주는 로션을 바른다. 모공을 수축시키기 위해 아스트린젠트를 바른다. 피부의 활력을 위해 수분크림을 한번 더 바른다. 자외선은 피부의 적이므로 선크림을 바르고, 메이크업베이스를 뭉치지 않게 고루 펴 바른다. 잡티를 가리는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콤팩트를 꾹꾹 눌러 바른다. 눈썹칼로 눈썹을 정리하고, 머리색과 같은 색으로 눈썹을 그린다. 눈썹은 꼬리로 갈수록 진해야 하며, 너무 굵거나 얇아도 안 된다. 속눈썹을 둥글게 감아올린다. 아이섀도를 바른다. 동일 계열 컬러에 좀 더 진한 색으로 립라인을 그린다. 아랫입술을 좀 더 도톰하게 그리는 것이 좋다. 립스틱을 바르고, 윤기를 주기 위해 립글로스를 덧바른다. 큰 붓으로 콧등 위에 흰 파우더를 발라 콧대가 높아 보이게 한다.... 그녀의 화장은 수수하다. 그녀는 사치스럽지도, 궁색하지도 않다. 그녀는 교통질서를 지키듯 화장의 상식을 준수한다. 그리고 그중 무엇 하나 생략할 수가 없다. 계속해오던 것을 하지 않을 수 없고, 각각의 화장품은 저마다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157쪽)
어쩜 화장의 순서를 이처럼 상세하게 묘사할까. 메이크업의 모범답안 같다. 화장을 처음 하는 메이크업 초년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얼굴 화장이 이토록 복잡하고 기능이 많은지를 알려준다. 화장품 이름까지 함께 적었더라면 군더더기였을까?
김동식 문학평론가의 해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전반부를 읽어나갈 때는 감이 쉽게 오지 않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지?', '이런 뜻이 내포되어 있나?' 하고 궁금했던 것을 해설 편에서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달려라 아비」에서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가지 긍정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긍정하는 자신을 긍정한다. 아버지에 대한 이중의 긍정. 아버지와 관련된 두 번의 긍정이 정신적 상처를 만들지 않으려는 즐거운 의지로 나타나며 더 나가서는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자기 배려로 나타났던 것이 아닐까. 정신적 상처의 기원(아버지)을 유목시키는 독특한 상상력은, 김애란이 보여준 한국문학의 새로운 풍경이기도 하다." 동감이다.
나의 자전적 에세이 『내 인생의 포인트 찾기』에서 나쁜 기억을 구태어 쓰지 않은 이유와 맥이 통한다. 기뻤던 순간의 기억은 다시 생각해도 즐거운 일이었지만, 나빴던 기억은 그렇지 않다. 그 옛날의 상처를 끄집어내어 기록한다면 그 상처는 마음속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영원한 덧으로 다시 생채기가 되어 나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 어떤 시절 마음속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은 자신과 세계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한 인물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고. 그 목소리는 이십 대뿐 아니라 오십 대, 팔십 대도 공평하게 허락된 몸짓이라고.
내 마음속 흔들리는 언어들을 잔잔한 호수의 윤슬처럼 부드럽게 표현한 『달려라 아비』는 청춘의 숨소리에 담긴 마음소리를 함께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