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 천 개의 파랑(2025), 허블
북 콘서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보령시립도서관 누리집에 참가 신청을 했는데 바로 앞 신청자가 1촌이었다. 캡처하여 카톡을 보냈더니 "어머 ㅋㅋㅋㅋ" 하며 "작가 책을 읽어봤냐"라고 물으며 책을 사주겠다고 고르란다. 그렇게 접한 책이다.
『천 개의 파랑』. 2019년 머니투데이가 개최한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이다. 허블에서 2020년 초판을 펴낸 후 43쇄째 책을 읽었으니 5년 후에 나와 만난 셈이다.
원래 응모하려던 작품의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짜'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동안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가 3개월 만에 써서 출품했다고 한다. 만화광이었었던 그녀가 안양예고로 편입할 정도로 창작을 좋아하는 작가적 재능을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출간이 집필속도를 못 따라갈 정도라는 나무위키의 설명처럼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필명을 가족 이름에서 한자 씩 따와지은 것만 봐도 천생의 가족 사랑을 알 수 있다.
『천 개의 파랑』. 어찌 보면 그녀가 표현한 천 개의 사랑이 아닐까?
이 책에는 3개의 사랑이 흐른다. 연재 가족 간의 사랑, 연재와 지수 간의 우정, 연재와 콜리(C-27)의 애마(투데이)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가장 간절하게 바란 건 딸들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채를 지고 있는 만큼 더 다가가기 어려웠다. 은혜가 아픈 손가락이었다면 연재는 신경이 손상된 손가락이었다. 어느 날 무득 쳐다보면 언제 다쳤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상처가 엉망으로 아물어 있었다. 상처가 흉터가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작가는 연재 엄마 보경의 마음처럼 가족 간의 사랑의 심리를 곳곳에 섬세하게 뿌려놓았다. 불편한 언니를 배려하는 연재의 심리도 담담하게 그리면서 마음과 행동의 움직임을 투명인간을 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연재와 엄마에 대한 은혜의 심리도 더 엿봤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연재와 지수 간의 우정도 적나라하게 내면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내성적인 연재에게 대회 입상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던 '쿨한' 지수와의 우정이 싹트는 과정 묘사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지수는 연재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데 비해 연재는 그렇지 않은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이해의 정석을 알려준다.
"이해에는 한계가 있고, 횟수가 있고, 마지노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이해해 주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상대방의 이기심을 지적한다"
멋진 말이 아닌가. 가족 간은 물론 친구 간 나아가 동료와 상하 간에도 모두 적용되는 정석 같은 말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연재의 잔잔한 내면이 어떻게 소용돌이치는지를 알려준다.
"이해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연재는 상대방의 모든 행동에서 사사건건 이유를 붙이지 않았다. 저렇게 행동하면 저렇구나, 하고 말이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해서 그러는지 싫어해서 그러는지 따위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 이해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타인의 이해를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해졌다. 관계에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적어도 지수를 만나기 전까지, 연재의 세계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였다. 적막하기도 했고. 지수는 연재에게 강풍으로 불어왔다."
대회 후에 지수가 자주 못 올 것 같다는 말에 연재가 시큰둥하자 연재가 토라지면서 던진 말 "너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처럼 우리 인간에게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있는 기능이 아예 없다. 다들 있다고 착각하는 것뿐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 과정을 보여준다.
연재와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의 애마도 가슴 뭉클하게 한다. 이제 세 살밖에 되지 않는 경주퇴마 투데이의 목숨을 2주만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한 연재의 노력은 투데이로부터 위로받는 언니 은혜에 대한 배려에서 출발했다. 연재 주변인들이 적극 동참하면서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 것도 좋았지만, 그들의 심리묘사에도 사랑과 배려가 듬뿍 담겨있다.
콜리와 투데이의 삶의 2막 경주 장면은 어찌 보면 인간보다 더 높은 그 무엇인가의 꿈과 이상이 담겨있는 것 같다. 다시 달리게 된 투데이의 행복을 느끼면서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는 행복의 속도를 높이는 투데이가 무거워진 자신 때문에 잘못될까 봐 두 번째 낙마를 한다. 내리사랑의 인간도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로봇은 주저 없이 결행한다.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속의 인물 콜리는 현실속의 엄마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2025.6.11 북콘서트 작가의 말).
콜리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콜리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그 단어들도 콜리에게는 잔잔한 파랑이었다.
눈부신 하늘의 파랑파랑함, 인간과 동물 그리고 로봇 마음속의 잔잔한 파랑까지도 파란색이 전하는 상징처럼 평화와 진실 그리고 조화를 생각게 하는 『천 개의 파랑』이다.
데면데면한 가족 관계, 시큰둥한 친구 관계를 좀 더 친밀하게 했으면 하는 당신이 읽었으면 좋겠다. 지수가 연재에게 내뱉은 말(너 보다 콜리가 더 인간적이겠다) 같은 말을 듣기 싫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