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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작가 동하 Jan 24. 2021

우리 가족 우체통

올해 초등학교에 올라가는 둘째 아이가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분주하다. 생각나는 말은 있는데 엽서에 글로 옮기려고 하니, 막히는 부분이 제법 있나 보다. 


"아빠, '터'는 어떻게 써?"

"터는 티읕 있지? '탱크' '토끼' 할 때 그 트. 거기에 어를 붙이면 돼"

"티읕이 어떻게 생긴 거지? 파할 때 그거?"

"아, 피읖 말고"

"아빠가 써 줘"

"응…. 요렇게 쓰면 돼. ㅌ"

"아"

...

"오빠, '쁜'은 어떻게 써?"

"비읍 있지? 그거 두 개 일단 써봐…." 


이 글쓰기의 시작은 일주일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근하고 왔더니 아내가 둘째 아이가 썼다며 엽서를 건네줬다. 삐뚤 빼둘한 꼬마 녀석의 엽서였다.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내로라하는 글쟁이들의 고급 문체와 정제된 표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그런 것. 


이 모든 시작은 둘째 아이의 이 엽서에서부터... 일주일이 지나니 '만이만이'가 '많이많이'로 바뀌었다.ㅎ


"아빠, 만이만이 좋아해요…. 내 머리위에 올려노세요. 답장를요…."


그날 바로 답장을 써서 잠든 아이 머리 위에 올려놨다. 아이가 아침에 그 엽서를 읽을 걸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날 아이는 또 엽서를 썼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또 답장을 썼다. 다만 그날은 두 장을 써야 했다. 오가는 엽서가 즐거워보였는지 첫째 아이도 이 엽서놀이에 가세한 것이다. 


다음날 아빠보다 빨리 일어난 아이들은 아침에 아빠가 보낸 엽서를 읽고는 곧장 또 답장을 쓰고 있었다. 이젠 아빠뿐 아니라 엄마에게도 썼다. 엽서가 오갈 일이 많아지면서 우리 가족에겐 엽서를 주고받을 공간이 필요해졌다. 


"상자에 넣어놓자" "그러면 누구한테 보낸 엽서인지 구별이 안 되잖아" "그러면 지정된 장소를 정해 놓을까" 


그러다가 "가족 우체통을 만들면 어때?" "와, 그거 좋은 생각이다"


아이들과 완성한 우리가족 우체통


그렇게 우리는 적당한 크기의 상자를 찾았다. 마침 '오*록' 차가 담긴 상자가 보였다. 딱 적당한 크기. 그리고 오리고 자르고 칠해서, 그럴 듯한 '우리 가족 우체통'이 탄생했다. 


그렇게 퇴근 후 나는 두 장의 엽서를 쓰는 게 일상이 됐다. 서점에 가서 10개에 천원, 이천원 하는 엽서 뭉치도 보충했다. 물량이 달릴 땐, 아이들에게 연습장과 종이도 얼마든지 엽서가 된다고 일러줬다. 


어느 날엔 꽂히는 물량이 장난이 아니다.


초3이 된 첫째는 자기의 생각을 엽서에 어느 정도 풀어낼 줄 안다. 한글을 웬만큼 쓸 줄 알게 되면서다. 대견하다. 둘째는 막히는 글자를 아빠, 엄마, 오빠에게 물어물어 한 문장을 겨우겨우 완성해 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이들이 받아쓰기라는 딱딱한 틀을 통해 한글의 풍성한 세계를 발견하기보다, 이렇게 쓰고 싶은 말을 써 가면서 알게 되길 바란다. 아빠는 '한글의 맛'을 고등학생이 돼서야 겨우 맛봤다면 아이들은 이런 엽서놀이를 통해 좀 더 일찍 그걸 알았으면 한다. 


한글의 풍성함을 발견하는 일은 아이들만의 영역은 아니다. 아빠 엄마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 부부는 이번 주 미*트롯을 함께 보며 가사에 나온 '볼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것이 '가사 특유의 은유적 표현 아니겠느냐'고 했고, 아내는 '아마도 사전에 등재된 단어일 것'이라고 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아내가 정답이었다. 볼우물은 '볼에 팬 우물이라는 뜻으로, ‘보조개’를 이르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들 영어는?"이라고 묻는다. 글쎄. 아이들이 궁금하면 그것도 찾아 나설 때가 오겠지. 영어는 모국어의 맛 정도는 제대로 본 후에 접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주변을 둘러보면 영어유치원이다 뭐다 상당히 위협적이다. 이런 내 생각을 상당히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변인들도 있기는 하다. 


나 역시 귀가 팔락거릴 때가 있지만, 언어라는 건 본인이 흥미만 생기면 언제든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가 이번에 받아온 초3 교과서들을 보니, 2학년까지 없던 영어 과정이 들어가 있다. 그렇게 또 영어를 접하면 되는 것이다. 접하다 보면 흥미가 생길 수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1년, 2년 뒤. 또 10년 후 '우리 가족 우체통'에 꽂히는 아이들의 엽서 내용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벌써 기대된다. 


아이들이 받은 엽서가 점차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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