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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델링 Feb 15. 2022

137 그때가 좋았던 것일까

브라질 파젠다

 노란 불이 들어왔다. 차 두 대가 빨간 불에 걸리지 않으려고 가속으로 내달았다.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뒤에서 경적을 울려대지만 헛일이다. 그들도 눈이 멀어 버린다. 계엄령이 선포되는 비상사태다. 하지만 군인들마저 눈이 멀어 버린다. 평온한 일상은 박살이 나고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처음부터 눈이 멀지 않은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가 있다. 모두가 눈이 멀었고, 오직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은 일상이 비상의 고난으로 치닫는 상황을 그려간다. 비상 상황의 잔혹함은 읽는 내내 신경을 당긴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격리 병동의 폭압적 시스템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나름의 일상을 만드는 것이 경이롭다. 그 긴 고난의 끝은 다시 눈이 보이게 되는 것일까, 상상에 맡긴다.


 누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언뜻 보아도 남자의 눈은 건강해 보이고, 홍채는 밝게 빛나고 있었고, 공막은 하얗고 도자기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을. 눈이 멀어 목숨을 부지할 방도를 찾는 길은 참혹하다. 보는 것과 못 보는 것의 차이가 맨눈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끝없이 움츠러들고, 피로감이 밀려온다. 혼란에 빠진 눈먼 도시는 바깥에서 시작된 비상사태일까, 잠복해 있던 일상의 새로움일까.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이 된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생존만큼이나 치열한 고뇌와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 타인을 향한 위안과 공감을 부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달라지려면 결심해야 하고 결심을 실천하려면 강한 의지와 고된 노력이 필요하다. 눈멀어 알게 된 게 있다면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었다는 것, 처음부터 눈이 먼 것이었다는 각성이다. 전기 주전자에 쒜~ 하며 따뜻한 김이 피어오른다. 바깥은 혹독하게 춥고 원래부터 일상의 이면이었던 비상은 지금도 등을 맞대고 있을 것이다. 평온한 일상은 하얗게 순간뜨거운 김에도 아슬아슬 출렁된다. 살짝 닿은 김에 손등이 빨갛게 부푼다. 그저 삶의 본질에 충실할 밖에 도리가 없다. 의사의 아내, 현명한 그녀에게 흙내음이 섞인 쓴맛, 크림처럼 부드러운 버터빵맛, 콧구멍이 훕훕거려지는 오렌지향 초콜릿 맛이 나는 커피를 준다. 브라질 파젠다, 자신의 삶에 존중과 예의를 다하는 그녀가 마시는 커피다. 눈먼 자들의 도시, 춥고 배고픈 생활고를 넘어 인간성이 상실되는 상황에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버티는 삶의 위대함을 알게 하는 책이다.


 열심히만 하면 다 잘 될 줄 알던 시절이 있었다. 호기심이 사라지고 분노가 자리를 차지하는 시간에 닿는다는 걸 늦게 배운다. 윤기 나고 웃음 나는 일이 자꾸 멀어진다는 것도 배운다. 미안한 마음과 안도감 사이를 오가며 사는 삶이 이어진다는 것도 배운다. 진득이 하지 못하고 여기 기웃 저기 하다가 늙어버리면 손에 쥘 게 없다는 것도 이제야 안다. 뭐든 참 늦게 배우고 더디게 안다. 한심하다. 휑하고 빈 듯한 마음이 급습하리라는 것도 때때로 느낀다. 곧 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간에 다가가고 있다. 기쁨과 설렘 대신 걱정이다. 정작 그 시간에 이르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대신 서성거리기나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푸념도 변명도 못 할 시간이 될 것이다. 홀로 서는 시간에 이르기 전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하자. 책 읽고 쓰고 또 쓰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든다는 건 살아가는 것이라 여기자. 쇠해진 마음을 성실히 다독거리며 지내자. 써지지 않는 글을 붙들고 즐겁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오늘의 커피 한 잔에 차곡차곡 시간을 쌓으며 살자.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을 기억하면서 살면 고만고만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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