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아니라 냉랭한 바람이 회오리 치듯 풀썩이며 들어온다. 손수 꾸민 듯한 간판이 운치 있는 카페다. 통나무로 만든 계단과 자작나무 선반이 눈길을 끈다. 카페는 넓고 통유리가 있어야 좋다 여겼는데 좁고 길고 어둑하고 작은 창만 있어도 근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릇 카페는 커피집 주인장의 취향에 따라 공간의 크기와 무관하게 분위기를 살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원두를 직접 사 오기도 하고 거래처에서 소량으로 사서 사흘마다 로스팅하는 카페다. 5kg 프로밧 로스팅 기를 사용해서 원두의 성격이 잘 드러나게 볶는다. 주인장은 오늘의 커피로 콜롬비아 안티오키아를 추천한다. 서늘하고 풍성한 가을 풍경이 펼쳐지는 커피라고 한다. 진한 초콜릿의 쓴맛이 부드럽다. 잘 익은 자두맛이라고 한다. 커피에 대한 주인장의 차분한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잔잔한 아침 바다와 휘청거리는 들판과 붉은 열매가 조르르 달린 가을 산을 느끼려고 애를 쓴다. 안티오키아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른다고 한다. 음, 잘 모르겠다. 시원하고 톡톡 튕기는 듯한 자몽의 산미에 겹겹이 쌓인 과거가 입안에서 혀 위에서 돌고 구른다고 하지만 그건 주인장의 기억에서 만들어진 맛일 것이다. 괴롭고 어지러웠던 일, 못나고 부족했던 일도 차분하게 곱씹게 된다고 하니 훌륭한 커피다. 현재의 시간을 충분히 소중하게 여기고 열심히 살고 있다는 뜻으로 여기는 나름의 해석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손잡이가 큼직해서 편안한 머그잔에 든 뜨거운 커피를 후후 마신다. 맛있다!
벌써 십이월 더하기 중후반이다. 장미, 작약, 카네이션, 라스 라스를 흔히 볼 수 있는 싱그러운 달은 진즉에 지났고 나른한 나무 둥치와 비틀린 이파리 몇 점 보이는 계절이다. 비우고 게우는 한 해의 마지막, 내가 가장 아끼는 달이다. 오월의 화려함과 분주함, 유월의 싱그러움, 칠월의 달뜬 기분과 팔월의 휴가라는 설렘 같은 건강한 기운은 하나 없는 시름시름한 달이지만 사랑스럽다. 점점 기울어지는 태양 아래 나의 마음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그렇다고 더없이 어둡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 그저 바닥을 쳤다는 뜻이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곳까지 쑥 내려갔다는 말과 동격이다. 이제 올라갈 일만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희망으로 새로운 다짐으로 아이템을 구성할 시간이다. 오늘의 커피는 상큼한 자몽의 그윽한 맛과 새콤달콤한 자두맛에 서서히 빠져드는 커피다. 지지부진한 능력으로 수고로움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련한 중생을 토닥토닥해주고애썼다고 응답해주는 기특한 커피다. 예민하고 섬세한 것도 좋지만 무던하고 느긋한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할 줄 아는 힘을 키우라고 귀띔해주는 커피다. 원데이 요가를 한 후 식빵을 한 덩이 사서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시는 커피라고 하자. 앞으로는 한 가지에 집중하며 기분 좋게 살아보자 혼잣말을 하는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