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특별한 장소에서 만나자

과테말라 핀카 엘 리모나 마이크로 랏

by 만델링

해외 배낭여행족을 위한 어드바이스를 읽다가 이내 포기한다. 어차피 혼자 여행을 가지도 않을 테고, 더구나 배낭여행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환전해 간 현금은 각각 나눠 보관해야 한다, 잠을 자는 동안 침대 다리와 가방을 묶어두는 게 낫다,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여권과 신분증 사본을 휴대폰 사진보관함에 담아 두라 등 중요하고도 꼭 외워둬야 할 가치가 있는 꿀팁이라도 별 소용이 없다. 집안 가풍이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인지라 여행도 빡시게 땀을 뻘뻘 흘리며 많은 곳을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늘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휴가 때는 더 강하고 정열적이며 격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기에 쉬라고 있는 휴가에 힘들게 다니고 싶지 않다. 나를 뺀 가족들의 생각이다. 괌, 몰디브, 푸껫, 칸쿤 등의 휴양지에서 먹고 자고 슬렁슬렁 헤엄치고 노닐고 싶은 마음의 식구들과 내 마음은 부딪힌다.


그래서 결정했다. 만연한 전염병에서 다소 자유로워진다면 나는 꼭 유럽 발트해 연안 핀란드 헬싱키를 갈 것이다. 먹고, 자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맘에 드는 웹툰이 있으면 1회부터 끝까지 쭉 이어서 보고 간식 먹고 또 뒹굴거리는 것이 휴가일 수 있지만 힘들더라도 많이 걷고 보는 것도 휴가라고 말할 것이다. 헬싱키의 어둡고 흐린 하늘을 보고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항구도시에서 핀란드 사람들의 아름다운 미소와 생활 방식을 볼 것이다. 회색 하늘빛 바다를 보며 상념에 잠긴 여행객, 멋지지 아니한가. 저마다의 이야기와 사연을 들고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스치는 산책은 또 얼마나 즐겁겠는가. 이만하면 방해받지 않고 혼자 하는 여행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묵은 피로도 풀고 세련된 북유럽의 디자인을 느끼며 특별한 하루를 보내면 꽤 근사하지 않을까.


오늘의 커피는 반복되는 여행 광고에 넋을 놓고 앉아 마시는 커피다. 빡빡한 일정이면 어떤가 이렇게 싼 데 하며 외치는 모델의 손에 쥐어 주고 싶은 커피다. 광고 속에서 커피 향이 느껴진다. 여행지를 걸으며 그 지역 원두를 살 것이다. 커피 원두는 그리 비싸지도 않고 무게도 가볍다. 수하물 무게 제한에 걸리지 않을 만큼 사서 선물할 것이다. 고소한 향기로 가득 찬 여행 가방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홀로 만끽하는 낯선 공기가 기다려진다. 과테말라 핀카 엘 리모나는 큰 오렌지 한 개를 통째로 먹고 난 뒤의 스파이시하고 시원한 맛이다. 카카오의 오일리한 진한 맛과 다크 초콜릿의 거칠한 쓴맛이 나직하게 울린다. 묵직한 맛에 가을 언덕에서 부는 소슬한 바람이 더해진 향기가 커피 맛을 도드라지게 한다. 한 모금 마시면 생각이 깊어지며 차분한 느낌이 든다. 찰랑거리는 황금빛 모래 해변을 거닐며 마시고 싶은 커피다. 과테말라 핀카 엘 리모나 마이크로 랏은 고양이 발톱에 걸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던 삶의 문제점들이 슬슬 풀어지는 기분을 들게 하는 휴식 같은 커피다. 삐걱거리는 내 인생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고쳐보려는 가상한 노력이 서럽지만 불완전함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억울하지는 않다. 꼬인 인간관계가 말썽을 일으키나 절망하지는 않으련다. 성숙해지려 애쓰다 보면 결핍 또한 메워지겠지. 오늘의 커피는 낯설고 특별한 장소에서 친구를 만날 때 같이 마시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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