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수킴 May 30. 2024

이 큰 덩치로 빨래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며.

아빠의 6화


사랑하는 미선에게.


어제는 함께 있었는데 오늘 밤은 곁에 아무도 없다. 조금은 화가 나고, 잠시 헤어짐이 다시 보는 기쁨을 더하게 할 터인데 왠지 조금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빨래하고(이 큰 덩치로 빨래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며 웃음 많은 미선이가 어쩔 줄 모르겠지만) 샤워하고 못 보게 돼서 난 화를 조금씩 앙금처럼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히고 그 화를 그리움과 사랑으로 바꾸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읍니다.


일전에 쓴(받은) 편지는 반듯하게 펴서 어젯밤 다시 읽어보고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고.


참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지 못했읍니다. 기다렸을 터인데 8시 40분 여수 직통을 타지 못해서 45분 쌍봉 가는 직행을 탔기 때문에 2시간 20분 걸려 쌍봉에 도착하니 11시경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하지 못했읍니다. 미안하다는 것 진심임.


어제의 만남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많은 도움이었나를 곰곰이 생각하고 사랑한다는 표현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라 그게 좀 말할 수 없다. (병신 머저리 같은 남)


내 손안에 남은 그대 체취를 느끼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대 부탁과 염려를 잊지 않고 지키려고 애쓰고 있음. 잘될 것 같읍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오늘 정식으로 발전 2과로 발령받고 부장한테 열심히 하라는 소리도 듣고, 일은 효율과에서. 그러니까 명령은 발전과, 일과 그에 따른 업무, 운동 시합까지도 효율과에서 합니다.


내일은 예비군복 입고 진지 보수 작업하고 모레는 불우이웃 돕기 탁구 시합, 금요일 예비군 훈련 이렇게 일주일이 갈 모양입니다.


내가 가진 책(월보) 중에 이대 철학과에서 발행된 ‘사색’이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서 좋은 글귀(우리말로 옮긴 주기도문)가 있어 적읍니다. 많은 도움 되기를.


“하늘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길 참 말씀이니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박는 속알에 더욱 나라 찾음이여지이다.


우리의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옵고 진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며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님께서 하나가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아멘”


그대 좋은 믿음을 위하여 항시 그 누구엔가 기도하는 사람.


사람은 서로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도 거룩한 사랑 속에서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좋은 밤과 매일 뜻있는 시간이 되기를. 헛됨이 없기를 바람.


- 사랑하는 사람이 -   1986.12.8.11.


PS. 울산, 서울 갈 때 정말로 몸 조심하고 꼭 가기 전 편지 쓰기 바람. 걱정되는 사람 하나 더 늘어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하는가 보다. 좋은 여행 되기를 빕니다.



이전 11화 이제는 완전히 친구가 되어버린 엄마와 아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