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미글린 잭 2

이름을 싫어하고 투렛을 가진 열여덟 소녀 미글린 블루 잭

by 곽동배

5

그를 처음 만났던 건 신입생 때였다. 그는 영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그는 매우 잘생겼고, 영국 신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그리고 그의 억양은 매우 매력적이어서 여자애들이 일부로 그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인기가 많았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전학 오자마자 여자 아이들이 매일 그를 보기 위해 그 주변에 몰려들었고, 선물 공세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게 낯설게만 느꼈다.

“영국에서는 나는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어. 그리고 나는 그냥 내 언어를 사용했을 뿐이야. 저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걸 난 모르겠다고.” 그는 처음으로 사귄 루크라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내뱉었다.

인기가 많지 않은 루크는 그런 그가 자신을 약 올리는 줄 알았다고 착각까지 할 지경이었지만, 그의 속내는 원래 그러지 않은 걸 알고는 그냥 그러려니 한 귀로 듣고 흘러 보냈다.

시간이 흘렀고 그는 자신의 인기에 어느 정도 익숙함을 느끼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여자들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것도 다 잘난 자신의 얼굴과 성격과 억양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철 지난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날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그도 나를 보고 이런 느낌을 받았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이 너구나. 나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재수도 없고 관심도 없는 평범한 학생. 자신의 영화 속 엑스트라 밖에 되지 않는 학생…… 내게 그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나는 (미글린 잭처럼) 붉은 머리에 초록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비앙카처럼) 가장 친한 여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테일러 잭이라는 남자 가수를 좋아한다. (미글린 잭과 비앙카처럼! 그리고 그 남자가수는 뭐…… 숀 블루 같은 남자일 테고.) 여하튼 그는 날 사랑하지 않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라는 대사처럼 자신에게 관심이 없던 유일한 사람인 나의 무심함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다가왔다.

“나랑 같이 파티에 가지 않을래?”

프롬도 아닌 그냥 파티뿐인데 그는 나의 에스코트를 자청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파티 따위 관심 없었다.

“아니. 집에서 신디랑 영화 볼 거야.”

내게는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테일러 잭의 영화를 보는 게 더 중요했다.

“뭐야, 그거 지금 너랑 내 얘기인 거야?”

비앙카가 말했다.

“왜, 네가 그랬잖아. 꿈꾸는 사랑 이야기가 있냐고.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말해주는 거야! 그리고 아직 끝나지도 않았거든? 끝나려면 3시간은 더 떠들어야 돼.”

내 말에 비앙카가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떠들어봐라. 비앙카가 말했다. 물론 내가 가진 또 다른 슈퍼파워 텔레파시로 비앙카의 생각을 읽었다.

그는 내게 여러 번 묻지 않았다. 딱 한 번 묻고, 한 번 거절당하자 아쉬움만 남긴 채로 뒤를 돌아섰다. 구차할 것도 없이 깔끔했다.

그날 저녁, 그는 파티에 치어리더 시드니를 데리고 갔다. 시드니는 외모도 몸매도 성격도 키도 목소리도 나와는 매우 달랐다. 모든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소녀였다. 시드니와 비교될 정도로 나는 타인이 호기심 따위 느끼지 않을 법한 평범한 소녀였다.

그날 파티에서 일어났던 일은 인스타그램을 보는 신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와 시드니가 아주 진한 키스를 했대! 신디에게는 재미있는 가십거리였지만 나에게는 한심한 십 대의 장난으로 보였다.

그의 에스코트를 거절당한 후로 그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가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내가 사는 지역에 테일러 잭이 공연을 하러 온다는 소식에 신디와 함께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리고 테일러 잭이 영화 촬영을 하러 온 걸 먼발치에서 구경을 하고 신디와 노는 것만으로도 나의 시간은 한없이 부족했다. 한 마디로 하면 그는 내 안중에도 없었다.

“너한테 그가 누군데?”

비앙카가 물었다.

“그?”

“어. 테일러 잭이 숀 블루라면 그가 따로 있을 거 아니야. 뭐, 케인 지거……”

“시발!”

음성 틱을 가장한 욕이 나와버렸다.

“너 일부로 나한테 욕 한 거지.”

비앙카의 표정이 굳어졌다.

“시발!”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비앙카가 내 말을 끊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그 흐름이 끊겨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6

스쿨버스에서부터 비앙카는 내게 물었다. 네 상상 속 연애의 남자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냐고. 비앙카가 물을 때마다 나는 고민 없이 숀 블루를 외쳤지만 숀 블루는 테일러 잭 역할이다. 내 주변에 있는 괜찮은 사람을 그로 만들고 싶었지만, 내 주변에 남자라고는 케인 지거스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절대 케인 지거스를 나의 그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스쿨버스는 학교에서 멈춰 섰다.

“아 첫 시간부터 피구야.”

“아, 씨.”

나는 체육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그것도 피구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 공을 받아도 언제 공이 내 손에서 벗어날지도 모르고, 언제 같은 편에게 주먹질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 작은 공간에서 피해 다니는 건 우리 안에 갇힌 햄스터보다 더 불행하다.

나와 비앙카는 캐비닛에서 냄새나는 체육복을 꺼냈다. 우리는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나 또 피구 빠지면 욕하겠지? 내 말에 비앙카는 그럴 땐 내가 욕을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비앙카의 대답에 실소를 내뱉었다. 너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케빈 지거스와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남자 애들은 농구를 했고 여자 애들은 피구를 했다. 나는 맨 뒤에 서서 날아오는 공을 기다렸다. 하지만 공은 내게 날아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다들 왜 이렇게 피구를 잘하는 거지? 날 심심하게 만들 생각인 거야? 아니면 다들 단체로 스테로이드라도 맞은 거야?

나는 멀뚱멀뚱 서서, 아니 음성 틱과 행동 틱을 조금씩 보이면서 내게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공이 날아왔다. 그것도…… 그것도! 피구공이 아닌 농구공이……! “악! 시발!” 나는 음성 틱, 아니, 진짜 욕을 내뱉었다.

공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데 이상하게 몸이 굳어버렸고 생각은 십만 가지 생각이 오갔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뽑자면 이 못난 얼굴 공에 맞으면 더 못나지겠지? 내가 죽기 전에 케인 지거스를 먼저 죽였어야 되는 건데. 내가 죽은 후에 비앙카가 남자 친구를 만들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있다. 나는 눈을 힘차게 감았다. 행동 틱아, 이럴 때 나와서 저 농구공을 주먹으로 쳐줘…… 하지만 이 바보 같은 행동 틱은 나오지 않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체감으로 느끼기에는 10초 이상 눈을 감고 있는 거 같은데 왜 공이 내 얼굴을 맞추지 않는 거지? 설마 나 정말 슈퍼파워가 생긴 거야? 시공간을 넘나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눈을 살짝, 살며시 떴다.

“어…….”

“…….”

“……루카스”

루카스였다.

돌처럼 굳은 내 앞에 대천사 미카엘 마냥 루카스가 서있었다. 그것도 내게 날아오는 농구공을 잡은 채로. 종소리가 울렸고, 주변에는 에로스 큐피드 할 거 없이 사랑의 신들이 우리 주변을 날아다녔다. 루카스, 네가 미카엘이라면 나는 루시퍼가 될 수 있어. 지옥을 추락하는 거 따위 별 거 아니야. 아, 잠깐만 루시퍼와 미카엘은 싸우지 않나…… 아무튼 루카스 주니어, 네가 나의 ‘그’를 해줬으면 좋겠어.

“미안.”

루카스가 말했다.

루카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변태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더럽거나 하지 않았다. 기분이 더러워야 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루카스니까.

“젠장!”

아, 이런…… 나가 죽어, 미글린 잭……! 미안하다는 루카스에게 욕을 내뱉었다. 루카스는 당황한 얼굴을 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죄지은 사람 마냥…… 아, 죄를 지은 사람 맞지! 루카스에게 “미안 미안! 틱이 나와버렸어, 진짜 욕 하려던 게 아니라!” 허둥지둥 변명을 하기 바빴다.

내 말에 루카스는 괜찮다는 말만 남겨 놓은 채 공을 들고 농구를 하고 있는 남자 애들 곁으로 떠났다. 정말 괜찮은 게 맞아? 그런 루카스를 보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다 루카스에서 피구를 하는 여자 애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스테로이드를 맞은 여자 애들은 이런 우리를 신경을 쓰지 않고 피구 삼매경에 빠졌다. 국가대표 선발전이나 올림픽을 연상케 하는 경기였다. 비앙카는 스테로이드를 맞지 않은 듯 내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너 언제 죽은 거야?

“얼굴 빨개.”

비앙카의 말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 그래?”

“사랑에 빠졌구먼.”

나는 비앙카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게 사랑에 빠진 거라고? 겨우 이런 행동이? 그냥 공을 잡아준 게 사랑에 빠질 만한 행동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네가 루카스 주니어한테 몇 번째 사랑에 빠진 거였더라……”

비앙카는 과거를 회상하는 사람 마냥 말했다. 아니, 몇 번째라고? 몇 번째라…… 그래, 몇 번째더라…….

첫 번째는 작년 여름 캠프였다.

엄마와 아빠가 투렛이라는 이유로 날 여름 캠프에 보내지 않았는데, 집에만 있는 것보다 여름 캠프에 가는 게 더 즐거울 거 같아 비앙카와 함께 여름 캠프에 갔다. 여름 캠프는 케인 지거스처럼 불성실한 학생은 오지 않고, 주로 과학 영재나 방송반, 드라마 클럽 같은 괴짜들만 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나를 놀릴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내 상상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영화에서 여름 캠프는 괴짜들의 캠프였는데…… 왜 내 눈앞에 케인 지거스와 농구부 녀석들이 있는 거지? 희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좋게 말하면 희망이 깨지는 순간이고, 평소처럼 말하면, 망했다. 내 여름 캠프는 망했다. 아니, 시작도 하지 못한 채로 끝나버렸다. 이 스쿨버스에서 뛰어내리면 죽을까? 아니…… 죽지는 않고 팔다리가 부러질 거야.

“얼마나 먼 거야?”

“뭐가.”

“여름 캠프 장소. 거기서 빠져나가서 집까지 가려면 몇 시간 걸릴까?”

“몇 시간이 뭐야. 며칠은 걸리겠지.”

비앙카의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 스쿨버스에서 뛰어내릴 담력도 되지 않고 어두운 저녁 길을 거닐 담력 따위도 없다. 그냥 한심한 녀석들에게 시달리는 게 낫지.

스쿨버스는 산속 여름 캠프 장소 앞에 멈춰 섰다. 선생님과 아이들 그리고 한심한 녀석들이 스쿨버스에서 내렸다. 나와 비앙카는 가장 늦게 스쿨버스에서 내렸다. 원래 주인공은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잖아?라고 말하던 숀의 영화 속 대사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주인공 따위 안중에도 없다.

여름 캠프 장소는 좀비가 나올 법한 깊은 숲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숲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면 여든이 훌쩍 넘어 발견될 거처럼 아주 깊었다.

“왜 이렇게 깊은 곳에서 캠프를 하는 거야.”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아닐까?”

비앙카의 대답은 나를 더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우리는 여학생 숙소에 가 구석에 있는 2층 침대 위에 짐을 올렸다. 떨어질 위험이 있는 나는 1층 비앙카는 2층에서 지내기로 했다. 비앙카는 며칠 전에 샀다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나는 수 천 번을 입어서 색까지 바랜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었다. 여름 캠프에서 여왕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비싼 트레이닝복까지 산 비앙카였는데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그러게 자신의 위치를 잊으면 안 되지.

여학생들은 숙소를 빠져나갔고 나와 비앙카도 그 틈에 껴 숙소에서 빠져나왔다.

영화에서 보면 여름 캠프에서는 마지막 날을 위해 연극 연습을 하던데 정말 영화처럼 연극 연습을 하는 거야? 바보 같은 내 질문에 옆으로 지나가던 케인 지거스가 이렇게 말했다.

“연극 연습을 한들 너는 주인공을 맡을 일이 없으니까 꿈 깨.”

나는 그런 케인 지거스의 코를 주먹으로 쳤다. 행동 틱이야, 행동 틱. 자연스러운 거잖아. 정말 자연스럽게도 그때 주먹이 나왔고, 그 주먹이 케인 지거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렸다. 다행히 코피는 나지 않았다. 케인 지거스는 나를 때릴 수 없이 째려보기만 했다. 나는 그런 케인 지거스의 모습에 승자의 미소를 보였다. 아이씨, 이번에는 음성 틱이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케인 지거스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매일매일 저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평소보다 더 오래 더 많이 저 녀석의 얼굴을 보며 일주일 동안 산속에 있을 생각을 하니 괴로울 지경이다.

“너는 케인 지거스가 왜 그렇게 싫은 거야?”

비앙카가 물었다.

왜냐고? 그 이유를 내게 묻는 거야? 왜는 없어, 그냥 존재 자체가 싫을 뿐이야! 그 말은 입 밖으로 내보내는 거 대신 속에서 내뱉었고, 겉으로는 주먹을 팍 올렸다. 싫은 감정 때문인지 주먹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이 실려있었다. 케인 지거스가 코피가 날 정도의 힘이.

팍! 소리가 났다.

그리고 누군가의 콧김과 코, 얼굴의 감촉까지 느껴졌다.

“윽……”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 소리는 누군가가 내 주먹에 맞았다는 뜻 같은데. 비앙카의 표정을 보니 누군가가 내 주먹에 맞았다. 제발 케인 지거스이길, 케인 지거스이길. 제발…… 제발. 신이시여 내 주먹을 맞은 남자가 제발 케인 지거스이길 바랍니다, 제발…… 천천히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속으로 되뇌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젠장……”

“아프잖아.”

남자였다.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 누군지 모르겠지만 운동부 같아 보이는 남자였다.

“아, 미, 미, 미…… 미, 미……”

미안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려운 단어도 아니고 오류가 난 로봇처럼 ‘미’만 미친 듯이 반복했다. “미…… 젠장! …… 아, 욕 하려던 게 아니고……” 나는 나 자신을 너무 당황하게 만들었다. 비앙카! 케인 지거스! 아무나 날 좀 도와줘.

“루카스, 미안하대, 얘가.”

몸이 굳어버린 내게 들리는 건 케인 지거스의 목소리였다. 분명 이 목소리는 케인 지거스다.

“얘가 투렛이 있어서. 주먹이 갑자기 나올 때가 있어. 뭐, 방금 전처럼 욕이 갑자기 나올 때가 있고”

“아…… 그래? 진작 말해 주지.” 남자는 코가 아픈 듯 코를 몇 번이고 만졌다. “아, 난 루카스야, 루카스 주니어.” 남자, 아니, 루카스 주니어는 코를 만지지 않은 손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런 루카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어, 난 미글린…… 블…… 아니, 미글린 잭……”

루카스는 코가 괜찮아졌는지 미소를 보였다.

“그게 첫 번째로 반한 거라고?”

비앙카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되게 사소한 거에 반하네. 그런데 그 정도라면 루카스가 아니고 케인한테 반해야 되는 거 아니야?”

“뭐?”

“아니…… 루카스가 오해할 뻔했는데 케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루카스한테 상황을 설명을 해준 거잖아. 그러면 루카스가 아니고 케인이어야 되는 거 아니야?”

“얼굴이 다르잖아, 얼굴이. 그리고 미소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그냥 둘은 완전 다른 사람이야. 케인 지거스가 그냥 사람이라면 루카스 주니어는 천사……”

“에라이”

“그런 표현은 나랑 어울리지 않지?”

비앙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겉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더니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또 반한 적 있어, 루카스 주니어한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두 번째로 반한 건 말이지.”

두 번째는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유진 선생님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앵커리지 병원에 딸린 상담 센터를 찾았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나는 엄마 옆에 가만히 앉아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엄마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서 그런지 한곳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젠장!” 내 욕설에 사람들은 나를 한 번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미글린 잭, 미글린 잭.”

기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엄마는 자리에 앉아 잡지를 보며 날 기다렸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 선생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진 선생님은 며칠 전까지 새치가 가득한 머리였는데 최근에 염색을 한 듯 머리가 석탄처럼 새카맸다. 나는 그런 유진 선생님에게 염색하셨네요 같은 다정한 말 따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잖아. 나는 유진 선생님 앞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떠들어대기 바빴다.

그때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들겼다. 나는 당연히 시선을 문으로 향했다.

“네, 들어오세요.”

유진 선생님이 말했다.

그 말에 누군가가 문을 활짝 열고 들어왔다.

“어…… 루카스?”

너무 뻔하게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루카스 주니어였다.

유진 선생님은 루카스를 아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루카스는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되는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너도 나처럼 상담을 받는 거야? 내 질문에 루카스는 고개를 저었다.

상담이 끝난 후 우리는 상담실 앞에서 10분 동안 떠들어댔다.

“그냥 병원에 봉사 다니고 있어.”

“사고 치고 하는 봉사?”

“아니, 나 그런 놈 아니야. 그냥 뭐…… 아무도 시키지 않고 자진해서 하는 거야, 이 봉사. 한 6개월 정도 이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거든. 토요일마다 병원에서 아이들 놀아주고 있어.”

“그런데 유진 선생님한테는 왜 온 거야?”

“입원한 아이가 유진 선생님한테 상담을 받고 있어.”

입원한 아이들도 챙기는 루카스 주니어를 오해할 뻔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잠깐만 루카스 주니어가 병원에 봉사하러 다닌다고?”

“응. 내가 방금 말했잖아.”

“반전인데. 근데 왜 말 안 해줬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래. 관심받는 거 안 좋아한다고.”

“걔 조금 괜찮은 사람 같네. 아, 그거 말고도 반한 거 또 없어?”

“많지.”

이밖에도 투렛이 있는 나를 놀리는 버릇없는 7학년들을 루카스가 혼내 주었고, 케인 지거스가 날 짜증 나게 할 때 루카스가 미글린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거 같다며 케인 지거스를 끌고 가주었고, 해밀턴 교장에게 혼나 기분이 좋지 않은 나한테 음료수를 건네준 적도 있었다.

“그게 다 반한 거라고?”

“응.”

“근데 왜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몰랐던 거야?”

“……”

나는 비앙카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왜 나는 루카스 주니어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몰랐던 거지? 그리고 오늘까지 루카스 주니어에게 25번 반해버린 거잖아. 그러면서도 몰랐다고? 설마 여태까지 루카스 주니어를 사랑하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부정한 거야, 나?

“부정보다는 깨닫지 못한 게 아닐까……”




7

비앙카에게 루카스를 반한 몇 개의 이유를 말한 뒤로 루카스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더 잘생겨 보이거나 더 멋있어 보이거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루카스 앞에만 서면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행동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바보처럼 말을 더듬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고도 루카스는 불만 없이 미소만 지었다. 콧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마저 듣기 좋은 정도니까…… 이건 분명 사랑에 빠진 거다.

그 이후로 나는 변태가 된 것 마냥 나의 상상 속의 ‘그’에게 루카스를 대입하기 시작했다. 미글린 잭은 테일러 잭에게 빠져 루카스 주니어에 대해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그렇기에 관심 따위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졸업반이 되어버린 미글린 잭과 루카스 주니어. 미글린 잭은 여전히 루카스 주니어에게 관심 없는 반면에 루카스 주니어는 미글린 잭에게 말을 걸고 싶고 인사를 하고 싶고 다가가고 싶고 아쉽기만 하다.

“재키.”

실컷 상상 연애를 떠들어 대는데 또 비앙카가 방해해 버렸다. 나는 그런 비앙카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왜, 또?!” 신경질적인 나와는 달리 비앙카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아니,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날 보고 그렇게 웃는 거야!

“그러지 말고 우리 글로 써볼래?”

비앙카의 말은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지금 묻는 거야? “나 타이핑 ‘젠장’ 못 하잖아.” 약점을 건드린 비앙카 때문에 날카로운 음성이 나와버렸다.

“아니, 내가 타이핑할 게. 넌 그냥 말만 해. 같이 네 블로그에 써보자. 혹시 모르잖아, 이 일로 네 글이 영화가 될지.”

비앙카의 말에 눈을 희번떡하게 떠버렸다. 솔깃했다. 머리 위로 전등이 반짝였다. 아니, 번개가 내리쳤다. 나는 영화가 된 나의 팬 픽션들을 생각했다. 브리짓 존스…… 그레이…… 애프터……

“숀 블루가 루카스 주니어를 연기할 수도 있어”

나는 비앙카의 말에 혹해버렸다. 꿈도 없는 투렛 소녀가 친구의 말에 꿈이 생겨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8

내가 말을 하면 비앙카가 타이핑을 했다.

비앙카와 함께 나의 소설을 썼다. 바보처럼 나라는 걸 알리고 싶은 모양인지 '블루'라는 필명을 썼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쓴 소설이라는 걸 모르는 듯 보였다. 조회수는 한 달 동안 50이 채 되지 않았다. 그중 나와 비앙카가 20 정도? 그럼 읽은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른 명의 사람이다. 그래도 서른 명이 읽은 게 어디야! 라며 비앙카는 나를 안심시켰다. 그래 조회수 20인 거보다 낫잖아.

그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미글린!”

비앙카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불렀다.

평소 같았으면 재키라고 했을 법도 한데, 미글린이라고 하는 거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일이. 내게 달려든 비앙카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이야, 비앙카! 말할 틈새도 없이 비앙카가 입을 열었다.

“학교 게시판 본 거야?”

“게시판?”

내 말에 비앙카가 핸드폰으로 학교 게시판을 들어가 내게 보여주었다. 무슨 일이야, 도대체.

“작가 블루, 네 소설 링크야, 이 주소가.”

“뭐?”

“네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누군가가 쓴 거야.”

나는 비앙카의 핸드폰을 빼앗아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비앙카는 내게 핸드폰을 건네주기 싫은 모양인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미안, 던지면 큰일이잖아. 그 말에 곧바로 수긍했다. 나도 물어줄 돈도 없다. 숀의 콘서트 티켓 값도 없는데.

“조회수도 봐.”

비앙카는 나의 블로그에 쓴 소설을 보여주었다. 분명 겨우 100을 넘었던 조회수가 천이 넘어버렸다. 비앙카, 설마 이거 네가 조작한 거 아니지? 내 말에 비앙카는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냐며 웃어넘겼다. 그렇다면…… “진짜 조회수가 이게 맞다는 거야?” 내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믿을 수 없었다.

댓글도 달려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댓글을 읽었다. 캐비닛 앞에서 이 댓글과 나만 있는 거처럼.

“학교 게시판에 소설 봤어?”

“소설? 아, 블루 블로그?”

“응, 그거. 내가 사랑하는 졸업반의 프롬 퀸.”

“봤지, 봤지.”

댓글을 읽는 나의 귀에 여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 글을 읽은 듯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흥분되기 시작했다.

“비앙카!”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비앙카의 이름을 불렀다.

“이거 뭐야? 뭐야, 뭐야? 나 이런 거 처음이야 비앙카!”

처음 받아보는 관심에 신이 난 나는 안절부절못한 채로 비앙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 학교에서 들은 건 나의 소설에 관한 것들이었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유치한데? 괜찮아, 누가 쓴 걸까? 분명 우리 학교야. 이런저런 이야기들. 내 글과 나에 대한 이야기들. 학교를 알아챈 건 처음에는 놀라웠지만, 나도 모르게 블로그에 학교 건물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다. 다들 알법했다. 내가 대놓고 힌트를 주고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뭘?”

혼잣말에 반응한 비앙카였다.

“응, 아니야.”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캐비닛에서 책을 꺼내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수업이 재미있다. 밀러 선생님이 실컷 떠들어대는데 그게 또 내 귀에 팍팍 박혀버린다. 이해가 되고 공부가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나답지 않게. 18년 만에 처음으로 공부가 재미있다고 느꼈는데, 그런 나를 방해하는 건 바로 해밀턴 교장이었다.

“미글린 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는 해밀턴 교장에 밀러 선생님과 학생들까지도 의아한 표정으로 나와 해밀턴 교장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의아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해밀턴 교장의 뒤를 따랐다. 내가 잘못이라도 한 거야? 나 누구를 괴롭히거나 유리창을 깨버린 건가? 내가 기억 못 하는 무언가를 한 거야? 그럼 나…… 몽유병인 건가? 그때 해밀턴 교장이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미글린 잭, 앉으렴.”

나는 벌써 교장실에 도착해 있었다. 정말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교장실까지 걸어온 기억이 없다. 나는 해밀턴 교장의 말에 책상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게 뭐지?”

해밀턴 교장은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더니 이내 나를 향해 모니터를 돌렸다. 모니터를 보란 말인가?

“여학생들이 공부도 안 하고 수업을 듣지도 않고 핸드폰으로 이것만 보고 있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이걸 쓴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는데, 이 아이디가 네 아이디 더구나. 어쩜, 넌 학교 아이디와 같은 아이디를 쓸 수가 있니.”

해밀턴 교장의 말에 머리를 콩 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는 현상이었다. 공부를 하지도 않고 수업을 듣지도 않고 내 팬 픽션만 봤다고? 다들 그럼 핸드폰으로 보고 있던 게 내 팬 픽션이었던 거야?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이렇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믿기지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해밀턴 교장은 미간을 구기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미글린,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 거니? 넌 지금 나한테 혼나고 있는 상황인데.”

해밀턴 교장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젠장!”

갑자기 음성 틱이 나와버려 크게 당황해 버렸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해밀턴 교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글린 잭. 네가 소설을 쓰는 걸 그만뒀으면 좋겠구나.”

“젠장! 뭐라고요?”

“학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너를 제외한 모든 졸업반 여자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나의 욕설 때문일까, 해밀턴 교장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해밀턴 교장 선생님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나는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저런 말을 할 담력 따위도 없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처량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네, 네. 해밀턴 교장 당신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에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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