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졸업반의 루카스 주니어
1
이상한 일은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 다 다음 날에도 일어났다. 캔디스와 루카스를 비롯한 치어리더와 농구부 학생들이 나를 반겼고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농구부의 조단은 “미글린 어제 네 활약 멋졌어.”라며 내 눈앞에 주먹을 가져다 댔다. 나는 처음 조단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고 하는 행동인 걸로 착각했다. 하지만 조단은 내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이런 거 영화에서 많이 봤어. 날 때리려는 게 아니라면 이런 거 아니겠어? 내 주먹으로 조단의 주먹을 툭 쳤다. 그러더니 조단은 주먹을 풀고 내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영화에서 본 그대로의 행동이었다. 이 일들은 나에게 낯선 일이었다. 나는 이런 학교 생활을 꿈꿔본 적 없다. 레지나 조지가 될 마음도 없었고, 그냥 조용히 무사히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를 내버려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내게 이것은 다 인기라며 인기를 실감하라고 했지만, 나는 이게 부담되었다.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아본 적은 18년 인생 속에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부모님도 이 정도까지 관심을 준 적이 없었다.
캐비닛에서 책을 꺼냈다. 그리고 캐비닛을 닫았다. 캐비닛을 닫자 저 멀리서 걸어오는 루카스와 1인이 보였다. 나는 그 1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루카스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제 재미있었어, 미글린.”
루카스다.
1인은 절대 저런 친절한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짧고 굵게 대답했다.
루카스의 말에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난 비앙카를 생각했다. 비앙카, 루카스가 나한테 어제 재미있었대! 비앙카, 넌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비앙카? 비앙카!!
교실에 가니 비앙카는 창밖을 보며 의자에 앉아있었다. 외로워 보이는 비앙카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내게 팔짱을 껴버리는 제이미 때문에 비앙카에게 갈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행동 틱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오른쪽 손이 올라갔다. 다행인지 오른쪽에는 제이미가 아닌 1인인 케인 지거스가 있었다. 내 주먹에 맞은 케인 지거스는 내게 고통을 토해냈지만, 나는 사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게 왜 거기 있었어. 그 말에 케인 지거스는 불만을 루카스와 제이미는 당황을 해버렸다. 일상이 되어버린 듯 케인 지거스에게 사과도 하지 않고 자리에 가 앉았다. 케인 지거스도 내게 별다른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았다.
뒤를 돌아보니 비앙카가 나를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면 반대로 내가 비앙카 너에게 잘못한 거라도 있어? 비앙카의 행동에 미간이 종이 짝처럼 구겨졌다.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왜? 비앙카, 너 왜 나를 피하는 거야? 묻지도 않고 핸드폰을 꺼내 비앙카에게 문자를 보냈다.
『비앙카』
뒤를 돌아 비앙카를 쳐다보니 내 문자를 확인하는 듯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
손가락은 분명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였는데 쓰고 지우기라도 한 걸까. 내게 도착한 비앙카의 답장은 물음표 하나였다. 아주 허무할 정도로 당황스러운 답장이었다.
『어제 왜 먼저 갔어?』
비앙카에게 뭘 물어볼까? 뭘 물어야 비앙카가 날 피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내가 한 대답은 어제 왜 먼저 갔냐는 말이었다. 분명 간다고 문자는 왔는데 비어퐁 게임 도중이어서 30분 지난 후에 확인해 버렸다. 이미 비앙카는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기 때문에 파티에서 비앙카를 찾지 않고, 『그럼 월요일에 봐!』라는 답장만 한 채 내 인생 처음으로 초대받은 파티에서 처음으로 신나게 놀아봤다. 비앙카는 그 파티가 재미없었을까? 아니면 피곤했던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파티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내가 가자고 한 걸까? 생각만 할 뿐 묻지는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비앙카는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답장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없었다. 비앙카는 가방에 핸드폰을 넣었다.
“비앙카, 비앙카! 답장!”
뒤를 돌아 비앙카를 보며, 핸드폰을 가리키며 비앙카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톤으로 말했지만 비앙카는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나를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다들 수업해야지.”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밀러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다.
밀러 선생님은 신나게 떠들며 신나게 칠판에 알아들을 수 없는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숫자와 이상한 기호들이 가득했다. 밀러 선생님, 당신은 역사 선생님 아닌가요? 역사도 숫자가 필요한 건가요?
나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비앙카에게 문자를 보냈다.
『비아아아아아아앙카아아아아아아』
그 이후로 열 번 이상 문자를 보냈지만, 수업이 끝날 때까지 비앙카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비앙카의 답장을 받는 걸 포기해 버렸다.
그때 쪽지가 날아왔다. 앞에는 재키라고 적혀 있었다. 쪽지를 펼쳐보니 밀러 선생님을 그린 낙서였다. 옆에는 괴짜라고 적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캔디스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캔디스에게 쪽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캔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그 쪽지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캔디스의 쪽지 때문인지 비앙카는 안중에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비앙카가 떠올랐다. 비앙카에게 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비앙카의 자리는 이미 빈자리였다. 벌써 교실을 빠져나간 걸까? 교실을 나갔을 비앙카를 따라 교실을 나갔지만 비앙카는 없었다. 아니, 복도에 있는 학생들 때문에 비앙카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젠장”
욕이 나왔다. 음성 틱은 아니었다. 비앙카한테 한 욕이었다. 왜 나를 피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캔디스 너는 알고 있니? 제이미 너는? 조단 넌? 루카스 너는 알아? 케인 지거스 너는?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비앙카만 아는 퀴즈 문제였다.
“재키!”
낯선 목소리임에도 혹시나 비앙카가 아닐까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캔디스였다. 캔디스는 내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밥 먹어야지, 어디를 가려고. 그대로 나는 캔디스에게 이끌려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가니 홀로 앉아있는 비앙카가 보였다. 도대체 왜 먼저 간 거야? 왜 혼자 앉아있는 거야! 비앙카! 내가 있잖아, 비앙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구마처럼 목이 막혀버렸다.
“저기 캔디스……” 캔디스의 이름을 부르는 거 자체가 떨리는 일인 건가? 나에게 힘든 일인 건가? 왜 캔디스의 눈치를 보며 캔디스의 이름을 부르는 거지?
“응? 왜?”
“비앙카랑 같이 먹어도 돼? 나랑 비앙카 제일 친한 친구잖아.”
“음…… 그래, 뭐. 내 친구랑 제일 친한 친구라니까.”
“고마워. 나 먼저 비앙카한테 가 있을 게.”
“넌 음식 안 받아”
“나는 도시락.”
이 말을 하고 캔디스에게서 벗어나 곧장 비앙카에게로 향했다. 고개를 처박고 식사를 하는 비앙카 앞에 내 커다란 가방을 올려놓았다. 비앙카는 음식에서 천천히 나로 고개를 올렸다. 네가 왜? 딱 이런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비앙카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도 않고 가방에서 크라프트 종이가방을 꺼냈다. 비앙카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로 꽂혀 있었다.
“젠장.”
내가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면 체해. 그리고 투렛 더 심해지면 어떡하라고. 이 샌드위치를 네 얼굴에 던져버릴까?”
다시 한번 내가 말했다.
비앙카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나에게서 음식으로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캔디스와 그의 친구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테이블 중간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나와 비앙카 양 옆으로 그 친구들이 앉았다. 나도 비앙카도 다른 이들과 밥을 먹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상황은 적응이 필요하다.
“샌드위치 맛있어?”
캔디스가 물었다.
“응. 먹을 만해.”
내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내 대답을 끝으로 캔디스와 그 친구들은 실컷 떠들어대기 바빴고, 나와 비앙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나는 음성 틱 몇 번을 했다) 음식에 고개를 처박기만 했다.
“재키 인스타그램 있어?”
캔디스가 물었다.
“어, 왜?”
“그럼 나랑 맞팔하자.”
캔디스의 말에 캔디스의 친구들이 나도, 나도라며 내 인스타그램 주소를 묻기 시작했다. 열다섯 명이던 인스타그램 친구는 어느새 오십 명이 되었고 며칠 후 백 명이 넘어버렸다.
2
며칠 동안 비앙카를 티 나게 챙겼다. 정말이지, 우리에게 관심 없는 케인 지거스가 알 정도로 비앙카를 티 나게 챙겼다. 학교를 갈 때마다 비앙카의 집에 가서 같이 스쿨버스를 탔고, 극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 제외하고는 비앙카가 집에 갈 때에도 같이 스쿨버스를 탔다. 비앙카가 캐비닛에서 책을 꺼낼 때에도 비앙카 옆에서 기다려줬다. 비앙카가 화장실에 갈 때도 비앙카를 따라갔고 당연 점심을 먹을 때에도 비앙카 옆에 붙어 비앙카와 점심을 먹었다. 물론 점심을 먹을 때마다 캔디스와 그 무리들이 옆에 붙긴 했다. 비앙카는 불편해 보였지만 꾹 참았다. 물론, 나도 아직은 그 존재들이 불편하다. 캔디스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내가 그런 친절이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재키.”
늦은 저녁 우리 집에 찾아온 비앙카였다.
나는 비앙카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찾아와 너무 반가웠다. 예전 같았으면 일주일에 두어 번은 우리 집에 찾아왔던 비앙카였는데 요즘 따라 매일매일 내가 비앙카의 집으로 출근하는 느낌이다.
2층 내 방에서 비앙카에게 소리쳤다. 바로 내려갈게, 기다려, 비앙카! 그리고 곧바로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는 그리운 비앙카가 서있었다. 들어와, 비앙카. 내 말에 비앙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들어오고 싶지 않은가 보다. 나는 옷을 여미고 현관문을 열었다. 비앙카는 없었다. 내가 헛것이라도 본 것일까? 하지만 내가 본 비앙카는 헛것이 아니었다. 진짜 비앙카였다. 목소리도 들었으니까. 나는 환영을 보거나 환청이 들릴 정도로 미쳐본 적은 없다. 집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앙카가 나타날 때까지 둘러보고 싶었지만 날은 매우 쌀쌀했다. 바람이 크게 불자 순간적으로 몸을 으스스 떨었다. 비앙카를 찾는 걸 포기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내방으로 가자마자 비앙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들리더니 이내 비앙카의 목소리가 들었다.
“왜?”
“너 혹시 우리 집에 왔었어?”
“아니, 왜?”
헛것을 본 거였다. 비앙카가 그리워서 상사병에 걸린 사람 마냥 말도 안 되는 헛것을 본 거였다. 비앙카와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비앙카의 헛것을 보고 비앙카의 환청을 들은 것일까?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비앙카는 대답이 없네? 그럼 전화 끊을 게. 라는 말만 남겨놓은 채 전화를 끊었다.
월요일이 되자 평소보다 더 비앙카를 챙겼다. 누가 내게 유난을 떤다고 말하면 내가 가장 잘하는 게 유난 떠는 거라고 대답할 정도로 영유아를 챙기는 부모 마냥 비앙카를 챙겼다. 캐비닛 앞에서도 비앙카만 기다리고 화장실을 가는 비앙카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밀러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 것도 기다리고…… 아, 이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기다림인가……? 심지어는 캔디스가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는데도 비앙카와 의자가 두 개뿐인 테이블에 가서 둘이서만 점심을 먹었다. 눈치가 빨랐던 캔디스는 비앙카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채버렸다. 그래서 점심시간만 되면 나를 쳐다보더니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비앙카랑 둘이 먹을 거지? 알았어.’ 나는 그런 캔디스가 고마웠다. 레지나 조지라고 불렀던 시절이 미안할 정도였으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비앙카는 내 정성을 알고 있을까? 아니, 몰라도 된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비앙카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들었으니 이렇게 유난을 떨며 챙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나는 비앙카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젠장!”
음성 틱이 눈치 없이 나를 약 올리듯 갑자기 나와버렸지만…….
3
내 노력에 비웃듯 비앙카와 더 멀어진 거 같다. 나의 노력이 부담된 것일까? 너무 과했거나 내 노력이 가식처럼 느껴졌을까? 그게 아니라면 비앙카는 내가 질린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 절망적인 생각이었다.
숀의 콘서트 날이 다가왔지만 비앙카는 내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분명 같이 티켓을 구매했는데 설마 나랑 같이 가고 싶지 않은 건가? 아니면 숀을 이제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건가? 또다시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앙카가 내게 연락하기를 기다렸다. 유치하게도 매일 내가 먼저 연락한 게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친구 사이에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면 안 되지만 노력하는 나와는 달리 계속 무시를 하는 비앙카가 괘씸했다.
숀의 콘서트 날까지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 나는 비앙카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다. 물론 또다시 비앙카의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겠지만 그게 비앙카가 원하는 거라면 해줄 수 있다. 비앙카는 내 친구이기도 하지만 내 가족이기도 하니까. 뭐든지 원하는 대로 들어줄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숀의 콘서트 날을 기다렸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는 비앙카를 포기해 버렸다. 10년을 만난 남자 친구라도 되는 듯 비앙카를 잃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비앙카는 나를 잃는 게 매우 쉬운 일처럼 행동했다.
숀의 콘서트장 앞에서 마주친 비앙카는 내게 가벼운 인사만 한 채로 콘서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게 차갑게 대하는 비앙카가 생각나 숀의 콘서트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비앙카가 앉고 있는 자리만 쳐다봤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투렛 때문에 내 옆에 앉는다면 당황할 거예요. 말해줄 사람도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비앙카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워 보였다. 검은색, 회색, 갈색 등등 어두운 색이 섞인 거 같았다. 나는 그런 비앙카에게 다가가지 않고 이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게 투렛이 찾아왔을 때에도 비앙카는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투렛 때문에 당황한 날 안심시키려고 하지도 않았다. 비앙카는 이제 내게 관심도 없고 나와 친구 하고 싶지 않은 거 같아. 비앙카는 내게 소리 없이 절교 선언을 해버렸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마지막 친구의 부탁이라도 되는 듯 비앙카가 원하는 대로 이제 비앙카와 친구를 하지 않을 거야. 다짐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 시선은 비앙카에게 갔다가 뒤늦게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그럴 때마다 루카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걸까? 루카스는 나처럼 깨닫지 않은 것도 아닌데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냥 당당했다. 나는 절대 할 수 없을 법한 당당함이었다.
“왜?”
“표정이 평소 같지 않아서.”
루카스의 말에 골똘히 생각했다. 내 표정이 어떻길래가 아닌 루카스가 내 표정을 평소에도 보고 있었던 거야? 라는 생각을.
오늘까지 정확히 75번 빠져버린 루카스는 내 기분이 풀릴 법 한 걸 알고 있는 듯 내게 다가와 말했다. 무슨 걱정 있는 거야? 그 물음에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루카스에게 75번 반했지만 루카스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 있으면 말해. 나에게도 좋고 캔디스도 잘 들어줄 거야. 네 친구 비앙카도 좋고.”
루카스의 입에서 비앙카가 나왔다.
루카스는 나와 비앙카 사이의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에 비해 케인 지거스는 나와 비앙카의 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조니 아줌마에게 말했으니까? 아니, 말을 하기도 했지만 케인 지거스는 보통 눈치가 빠른 게 아니었다. 번개보다 빨랐다. 유일하게 내게 ‘너 비앙카 레인이랑 싸웠니?’라고 묻는 사람이었다.
스쿨버스에서는 비앙카 뒷자리에 앉았다. 비앙카 옆자리는 늘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나는 비앙카 옆자리에 앉아 오늘 학교에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고 싶었다. 루카스가 나에게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어. 네가 보면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날 특별하게 대해주고 있는 거 같아. 그렇지 비앙카?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비앙카가 없다.
비앙카가 스쿨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스쿨버스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앙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스쿨버스가 출발하고 비앙카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핸드폰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캔디스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서 달콤한 잠에 빠져들고 싶다. 비앙카도 아무도 없는 달콤한 꿈을 꾸고 싶다. 나쁜 비앙카, 못된 비앙카,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에게 차갑게 행동하는 거야, 나쁜 비앙카. 꿈속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랑 실컷 비앙카의 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다.
4
캔디스 무리와 다니기 시작했다. 하이틴 영화에서 보면 학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학생들은 꼭 세 명씩 다니고, 중간에는 가장 잘 나가는 여왕벌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캔디스는 레지나 조지처럼 여왕벌도 아니었고 나름 친구들에게는 착한 존재였다. 누굴 괴롭히는 걸 본 적도 없었고. 과거의 나와 비앙카는 캔디스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캔디스는 다섯 살 어린 동생처럼 나를 챙겼다. 캔디스에 비해 키도 작지 않았던 나를 어린 동생처럼 챙기는 건 부담이었지만, 비앙카 대신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캔디스는 나에게 자매라고 불렀다. 정말 내가 다섯 살 어린 동생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캔디스의 다섯 살 어린 동생과 닮아서였을까? 그게 아니라면 캔디스는 원래 친구에게 자매라고 부르는 걸까? 캔디스에게 이유는 묻지 않았다.
캔디스는 나의 투렛 패턴을 알고 있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법한 패턴이었다. 내 행동 틱과 음성 틱에 대해서 알고 난 후로 음성 틱이 갑자기 나와 욕을 해도 당황하지 않고, 위협적인 주먹이 올라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내가 내뱉는 실제 욕과 음성 틱의 욕의 차이도 알고 있었다. 내가 실제 욕을 할 때는 무슨 일이냐고 묻기까지 했으니까. 학교에서 내 음성 틱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비앙카뿐이었지만, 이제 비앙카 대신 나에게는 캔디스다.
나는 캔디스가 비앙카 보다 나은 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처음에는 비앙카의 장점만 보여서 캔디스가 나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는 내 눈에 캔디스의 장점만 보였고 비앙카는 단점만 보였다. 친구를 무시하고 배신하는 사람과 친구에게 잘해주고 챙겨주는 사람. 전자는 이제 친구 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고 후자는 평생 친구 하고 싶은 사람이잖아. 나에게는 비앙카가 전자 캔디스가 후자 같은 사람이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캔디스와 같이 놀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다니는 와중에도 비앙카가 떠올랐다. 나는 그런 비앙카에게 단걸음에 다가갔다. 그때 나는 비앙카가 너무나도 그리웠고 비앙카를 되찾고 싶었다. 비앙카는 캐비닛에서 책을 꺼내고 있었고 나는 캐비닛 뒤에 서서 비앙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낼까 머릿속으로 빠르게 회전 중일 때 음성 틱이 나를 괴롭혔다.
“젠장!”
모르고 음성 틱이 나와버렸다.
방금 전 욕설이 미글린 잭의 음성 틱임을 눈치채버린 비앙카는 재빨리 캐비닛 문을 닫고 문 뒤에 서있는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뇌까지 느껴졌다. 전류라도 흐른 걸까? 그런데 당황하고 긴장한 나와는 달리 비앙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뒤돌아 반대편으로 가버렸다. 당황했다. 이렇게 하면 나와 대화를 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게 차가웠다.
“너도 그냥 무시해 버려.”
내 귓가에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캔디스가 서있었고, 캔디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늪지대의 마녀 같았다. 하지만 캔디스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나도 무시하는 법을 알고 있다. 무시당하는 법만 아는 것은 아니었다. 무시를 당했으면 똑같이 무시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유치하지 않은가? 과연 그게 최선의 방법인가?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비앙카와 다시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기분 안 좋으면 셰이크나 먹으러 갈래?”
대답 없는 내게 캔디스가 물었다.
“셰이크?"
“가게 이름이 괴짜 같긴 한데 레번 부르프 아저씨의 초콜릿 케이크라고 우리 아지트가 있거든. 우리 학교에서는 나랑 내 친구들만 가는 곳이야. 그리고 굉장히 맛있어. 다이어트를 잊게 하는 맛이야, 그곳은.”
캔디스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내가 캔디스랑 친구라는 거잖아. 캔디스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셰이크를 먹으면서 캔디스는 내 고민보다 팬 픽션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팬 픽션을 왜 쓰기 시작한 거야?부터 시작해서 팬 픽션에 내 캐릭터도 나오면 안 되냐는 질문까지. 하지만 캔디스의 질문은 나를 부담되게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수 없으면 웃음으로 넘길 수도 있었다. 내가 웃음으로 넘기면 또 다른 질문을 했다. 나에 대한 배려였다. 나도 그런 캔디스의 배려가 무척이나 좋았다.
그 이후로 나는 단둘이서 셰이크를 마셨다. 살찐다며 케이크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했던 캔디스는 내가 먹는 모습에 한입 두 입 씩 뺏어 먹다가 결국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다. 나는 그런 캔디스가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학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착한 사람인데? 캔디스에게 레지나 조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네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주먹을 날려버릴 수도 있다. 보디가드를 자처한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케빈 코스트너가 되어 캔디스 휴스턴 대신 총알을 맞아줄 수 있다.
레번 부르프 아저씨의 초콜릿 케이크 가게에 루카스와 케인 지거스가 들어왔다. 둘이 베스트 프렌드라도 되는 걸까? 요즘 따라 왜 이렇게 자주 붙어 다니는 걸지? 원래부터 자주 붙어 다녔는데 내가 몰랐던 걸까? 케인 지거스는 내 쪽을 쳐다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구겼다. 나는 캔디스랑 같이 다니면 안 돼?라는 표정으로 케인 지거스를 쳐다보았다. 질 수 없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마냥 우리는 서로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케인, 루카스!”
캔디스의 부름에 우리의 눈싸움은 무승부로 끝내게 되었다.
“앉아도 돼?”
루카스의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냥 얌전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떡이기만 했다. 다행히 루카스는 내 옆에 앉았고, 케인 지거스는 캔디스 옆에 앉았다.
루카스와 케인 지거스의 셰이크와는 달리 나와 캔디스의 셰이크는 바닥을 향해가고 있었다. 속도를 내며 먹었지만 이제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루카스가 셰이크를 다섯 번 마실 때 나는 한 번 마셨다.
“아, 맞다. 미글린 잭.”
“왜.”
“엄마가 요즘 왜 안 오냐고 묻던데.”
“요즘은 친구들이랑 노니까…… 조만간 갈 게.”
“그래.”
케인 지거스와 나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캔디스와 루카스. 둘이 도대체 무슨 사이길래 서로의 집도 서로의 부모도 아는 걸까? 설마 사귀기라도 했을까? 딱 이런 의문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의 관계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라고 할 것도 없다. 나와 조니 아줌마의 관계가 특별할 뿐이지 케인 지거스와는 아무것도 없다.
“유일하게 내가 투렛이 없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야, 케인 지거스가.”
궁금하지만 묻지 않은 캔디스와 루카스에게 말했다. 그들도 내가 10년 이상 투렛을 앓아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말을 이해한 캔디스와 루카스는 우리가 10년 이상 지속된 관계임을 알게 되었다. 나와 비앙카만 알던 사실이었는데 이제 나와 비앙카가 아닌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옆집, 이웃이야 우리.”
케인 지거스가 내 말에 덧붙였고,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미글린 잭과 알고 지내는 거야’라는 뜻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었다. 다섯 시가 되자 케인 지거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바이트.”
비앙카와 멀어진 이후로 DVD를 빌려보지 않아 레드 마운틴 DVD 스토어에 갈 일도 없었다. 내 지갑에는 크리스 아저씨가 특별히 나를 위해 만들어준 무료 관람 상품권 두 장이 있다. 케인 지거스에게도 준 적이 없는 것이었다.
“DVD 보러 갈래?”
내가 물었다.
“무료 관람 상품권이 두 장 있거든. 한동안 사용을 안 했더니 유효기간 날에 다가오고 있네.”
거짓말을 했다. 급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 말에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캔디스 너는? 미안. 나는 오늘 7시까지 가야 되거든. 영화보다 보면 좀 늦어질 수도 있잖아. 둘이 재미있게 봐. 나는 캔디스의 말에 실망해 버렸다. 나와 루카스 둘이 영화를 보게 되면 좋은 거 아니야? 신나야 되는 거 아니야? 행복해야 되는 거 아니야? 캔디스에게 고마워해야 되는 거 아니야? 라고 묻겠지만 나에게는 좋은 게 아니었다. 우리 집에 방문한 내 또래의 남자는 케인 지거스 빼고 아무도 없었고 나는 남자와 둘이 한방에 있는 게 매우 두렵다. 그게 루카스여도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영화가 목적이라고 해도 집에 남자를 데리고 오는 걸 우리 부모님이 보게 된다면 난 매우 부끄러울 것이다. 그리고 루카스와 있는 거 자체가 내게 긴장이고, 긴장하면 내 투렛은 더 심해질 테고…… 그리고 또…….
“젠장!”
음성 틱이 나와버렸다.
“투렛이지?”
캔디스가 물었다.
“응, 미안.”
사과할 것도 아닌데 사과를 해버렸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음성 틱이 나와버렸다.
“미안, 루카스. 생각해 보니까 나 오늘 가족들이랑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어. 엄마 저녁 식사 준비 도와줘야 되는 걸 깜빡해 버렸네.”
거짓말을 해버렸다. 숀의 팬 픽션이 아닌 루카스 주니어의 팬 픽션이라는 거짓말 이후로 처음으로 하는 거짓말이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나중에 보자, 영화.”
루카스는 별로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번 부르프 아저씨의 초콜릿 케이크 가게를 빠져나와 서로의 집으로 향했다. 집이 같은 방향인 캔디스와 루카스는 루카스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반대 방향인 나는 그냥 걸어갔다. 루카스가 내게 태워줄까라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거절해 버렸다.
레번 부르프 아저씨의 초콜릿 케이크 가게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비앙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영화관이 있다. 나는 그곳에 가 잠시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비앙카를 지켜보았다. 비앙카가 DVD를 보자고 하면 밤늦게까지 라도 볼 수 있는데…… 비앙카에게 버림받았지만 비앙카가 보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