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대학 동기인 친구 J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녀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이번엔 5년 만에 귀국을 한 거라 정말 오랜만에 만났다. 어찌나 반갑던지.
우리는 한참 동안 대학시절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동기 애들 만났는데 그 교수님 그 과제 낸 건 지금도 화난다고 그랬어. 그런 과제는 왜 낸 거야?" "과에서 실무에 필요한 건 하나도 안 가르쳐줬어. 프로그램도 다 독학했다니까." "수업내용이 하나같이 낡고 쓸모없어. 20년째 같은 수업이라니." "우리 학년에는 디자인은 못하면서 허세에만 찌든 선배들이 많았어. 맨날 표절이나 하고. 못하면 나서질 말아야지."
그렇다. 대부분 학교 욕이었다.ㅎㅎ
J는 최근 고백부부란 드라마를 인상 깊게 봤다고 했다. 부부가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의 기회를 얻게 되는 내용인듯했다. J는 다시 대학시절로 돌아간다면 다른 건 몰라도 대학 때 만난 친구들이 너무 소중해서,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동기들과 연락하고 지내진 않지만 학교에서 즐거운 추억을 많이 쌓았다. 우린 어렸고 열정적이었고, 그땐 참 뭘 해도 재미있었지.
하지만 인생사, 어떻게 좋은 일만 있을까. 힘든 일도 있었다.
2학년 마치고 휴학 후, 꼬박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3학년 때 낼 등록금과 1년 치 용돈을 모았다. 예금통장에 돈이 차곡차곡 쌓여갈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돈 잠깐만 예금에다 넣었다 빼야 되어서 그런데 몇달만 빌려줄 수 있어? 복학할 때 다시 돌려줄게. 아이고~ 내가 설마 네 돈 떼먹겠니."
그렇다. 설마는 사람을 잡는다. 나는 돈을 떼 먹혔다. 여유 있는 대학생활을 해보려고 1년간 열심히 일했건만 그 대가가 가난과 우울일 줄이야. 기가 막혔다. 그나마 등록금까지는 안 빌려줘서 다행이었달까.
나는 3학년 생활을 하며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집에 말하면 난리 날 것 같아서 비밀로 했다. 그래서 따로 용돈을 받을 수도 없었다.) 졸업식과 입학식 때 선물 받았던 몇 개 되지 않는 금목걸이와 금 팔찌, 금귀걸이를 싹 팔았다. 복학하면 그만두려고 했던 아르바이트도 계속했다. 그렇게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돈을 죄다 짜냈는데도 인쇄소에 낼 과제 출력비 10만원이 부족해서 두 과목을 낙제당했다. 처음으로 학고라는 걸 맞아봤다.
나중에 들은 말인데, 과제를 제출만 했으면 A여서 차석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 했다. 하지만 그보다 억울했던 건 그때 맞은 학고 때문에 졸업학점이 아슬아슬해졌다는 것이다. 졸업학점을 채우기 위해 남들 다 노는 4학년 때 1교시부터 8교시까지 전공수업을 꽉 채워 들어야 했다. 그것도 친하지도 않은 후배들과 말이다. 여윳돈이 없으니 동기들과의 술자리는 자연히 빠지게 됐다. 사준다고 같이 가자고 했지만 얻어먹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렇게 즐거웠던 나의 대학생활은 3학년 때부터 도미노처럼 한순간에 와르르 쓰러져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베스트 프렌드 Y도 갑자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날 집 앞에서 만나 손바닥을 펼치고 각자 가진 돈 전부를 세어보았다. 동전까지 탈탈 털었지만 3천원이 채 되지 않았다. 그 돈으로 불꽃 막대기와 몽쉘 한 박스를 샀다. 공원에서 불꽃 막대기를 돌리며 글씨를 만들면서 놀았다. 그리고 우리집에 가서 몽쉘을 쌓아 케이크처럼 만들었다. Y가 가져온 루돌프 머리띠를 쓰고 몽쉘 케이크 앞에서 촛불을 부는 사진은 지금도 갖고 있다. 이보다 더 가난한 크리스마스 파티는 없었을 텐데도, 그래도 우리는 웃었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돌려받지 못한 돈에 미련이 사라졌다. 사람을 잃는 것에 비하면 돈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학생 신분인 내가 그 큰돈을 선뜻 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그 사람을 믿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
어색함을 이겨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상대는 미안함 때문인지 창피함 때문인지, 것도 아니면 앞으로도 돈을 갚을 생각이 없어서인지 불편해하며 노골적으로 나를 피했다. '내가 처음에 돈을 돌려달라고 너무 압박했나?' '가까운 사이라도 돈은 빌려주는 게 아니라잖아. 빌려준 내 실수였어.' 생각지도 못한 냉정한 태도에 한동안은 나 자신을 탓했었다. 사이비 종교에 발을 담근 사람처럼 이성적이지 못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그 사람을 진심으로 미워하지도 못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젠 그 사람이 참 뻔뻔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기도 피곤하다. 그냥 앞으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대학시절을 생각하면 드라마같이 예쁜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다정한 선배들과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 마시며 수다 떨던 기억. 중국집에서 자장면 배달시켜서 야외수업했던 기억. 싸고 맛있는 학식을 먹고 좋아하는 철학교수님 수업을 1교시부터 8교시까지 들었던 기억. 축제 때 포장마차를 하며 그때까진 먹어보지도 않았던 닭똥집을 열심히 볶던 기억. 영화 동아리, 광고 동아리 어딜 가도 환영받으며 다른 과 사람들과 친해졌던 기억. MSN 메신저로 서로 좋아하는 음악 MP3 교환하며 밤을 새웠던 기억 등 매일매일이 버라이어티해서 싸이월드에 학교생활 사진을 올리는 게 나의 소소한 낙 중 하나였다. 내가 생각해도 최선을 다해 놀았다. 그러나 행복한 대학생활을 떠올렸을 때 마냥 웃을 수 없는 건 힘들었던 날의 기억이 꼬리를 물고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비단 대학생활만 그럴까.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런 극단적인 일들이 동시에 자주 일어났다. 사주팔자에 초년 운이 안 좋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랄까. 어쩌면 반반도 아니고 힘든 일이 더 많았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친구처럼 과거로 돌아가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란 생각이 든다. 그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존재함으로 지금의 내가, 또 우리 가족이 있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다.
지금 누리는 이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지 안다. 남의 이목보다 내 인생에서 진짜로 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과거의 아픈 경험들로 인해 더 나은 지금을 살게 되었으니 다 괜찮다. 그리고 새삼 그 우울했던 시기에 나를 응원해주고 곁에 있어준 친구들이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