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몸의 고통, 편안한 삶의 행복을 낳는 원동력이다
불편한 몸의 고통, 편안한 삶의 행복을 낳는 원동력이다
베토벤은 걸으면서 작곡했다. 칸트는 산책하면서 책 보다 더 소중한 사유체계를 잉태했다. 생각의 발로(發露)는 발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책 보다 더 소중한 산책을 통해 몸은 더없이 맑은 사유의 샘물을 만들어낸다. 글도 책상머리에 앉아서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몸이 겪은 체험적 각성을 몸으로 쓰는 것이다. 니체도 몸으로 썼다고 고백한다. “발로 글을 쓴다. 나는 단지 손만으로 쓰지 않았다. 발은 언제나 글 쓰는 자와 함께하길 원한다. 내 발은 단단하게, 자유롭게, 용감하게 때로는 들판을, 때로는 종이 위를 달린다”(즐거운 학문 52, 56쪽). 몸이 느낀 감각은 몸이 간직하고 있다. 머리에는 한 때의 추억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내 생각과 느낌은 모두 몸으로 각인되어 있다. 니체는 독창적인 순간 역시 폭발적인 근육의 힘이 동반된다고 한다. 느닷없이 달려오는 아이디어 하나가 번쩍이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면서 몸을 관통할 때 진저리를 친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솟구칠 때 흔들리는 몸을 붙잡고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근력이 요구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살아있는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185쪽).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書)》에 나오는 말이다.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분명 몸은 움직이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서 머리만 썼을 것이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움직이지 않고서는 몸으로 느낄 수 없다. 어제와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제와 다른 느낌이 동반되는 몸의 움직임이 따라 주어야 한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삶도 세상도 움직이지 않는다. 몸의 정체는 나의 정체성마저 잃게 만든다.
운동하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다
“젊음은 알지 못한 것을 탄식하고, 나이는 하지 못한 것을 탄식한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앙리 에스티엔(Henri Estienne)의 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젊음은 연륜이 부족해서 잘 알지 못하고, 무엇이든 알 수 있는 늙음은 기력이 쇠약해져서 몸을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 점차 줄어든다. 할 수 있는 젊음이 유지될 때 오히려 하지 않는 게 운동이고, 할 수 없는 체력이 안 될 때 오히려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또한 운동이다. 젊은 시절에는 굳이 운동하지 않아도 일상생활하는 데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운동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동하지 않고 운동의 필요성도 절감하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면서 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절감하지만 운동할 여력이 따라주지 못해서 차일피일 미루며 지내기 일쑤다. 젊음은 알 수 있는 인식능력의 한계를 지니고 나이듦은 할 수 있는 실천능력의 한계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동해야 한다는 당위적 주장은 여전히 먹히지 않는다. 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이마다 다르겠지만 운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만 절박한 수준과 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젊은 시절 운동으로 체력을 닦아 놓지 않으면 나이 들어 고생한다는 주장은 젊은이에게 다급하게 와 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량은 현격하게 감소하고 체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지므로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시간을 확보해야 된다는 당위적 주장도 이해는 가나 몸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이 모든 ‘해야 한다’라는 당위와 ‘그러므로’라는 근거가 미래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즐거운 학문, 67쪽). 니체의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운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떤 사람에게도 머리로 이해는 가나 행동으로 옮겨 실제로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별 다른 효용성이 없다.
“실천하기 위해 사유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니체의 말이다. 실천하기 전에 사유하고 연구하는 시간을 길어질수록 실천은 물 건너간다. 물이 다 마를 때까지 기다리다 정말 하고 싶은 일도 물 건너간다. 물 건너가기 전에 물을 건너지 않으면 물 건널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다. 실천과 사유의 구분과 분리는 실천을 미천한 행위로 전락시키고 사유를 드높이는 엉뚱한 역기능과 폐해를 가져온다. 니체는 신체로 이루어지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생활 철학자다. 니체의 삶과 일생이 인생철학으로 녹아든, 사유와 실천이 일치한 보기 드문 철학자다. 니체가 말한 실천과 사유와 연구에 관한 말은 “운동하기 위해 사유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로 바꿔 쓸 수 있다. 운동을 시작하는 데 필요한 유일한 사유는 운동을 바로 시작하겠다는 다짐과 결심이며 다짐과 결심대로 바로 행동으로 옮겨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운동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만 생각하고 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마음만 먹고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도 나름 많은 노력을 통해서 운동하지 않는 방법을 깨달은 사람이다. “무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결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는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7쪽). 우치다 타쯔루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에 나오는 말이다. 이걸 운동으로 바꿔 써도 여전히 일맥상통한다. “운동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의지의 결핍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한결같이 노력해온 결과가 바로 운동하지 않는 지금의 상태입니다. 운동하지 않는 습관은 ‘나태의 결과’가 아니라 ‘근면의 성과’입니다.” 운동하지 않는 사람이 주로 머무는 곳은 의자다. 의자에 의지할수록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생각을 거듭한다.
의자에 의지(依支)할수록 움직이려는 의지(意志)도 박약해진다
시인 마빈 벨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의자에게 팔, 다리, 엉덩이, 등을 주고 컵에게는 입술을 병에게는 목을 준다." 율라 비스이 《면역에 관하여》에 인용된 말이다. 우리는 엉덩이를 의자에 주고 팔걸이에 팔을 걸고 다리에 힘을 빼고 앉아서 쉬면서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는 시간을 앞당겨 온 셈이다. 팔과 다리가 힘든 노동을 하지 않고 의자에 내 몸을 맡기고 주로 머리로 생각하는 정신노동을 하면서 각종 신체 질환은 물론 정신 나간 사람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의자는 우리 몸을 의지하게 만든 장본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고 주장하는 책을 한 권 만났다. “편리함은 어떻게 인류를 망가뜨리는가”라는 부제목이 붙은 《의자의 배신》은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자세, ‘앉아 있기’를 통해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면서 우리 몸은 불안, 우울, 심장질환, 유방암, 대장암, 제2형 당뇨병, 고혈압, 비만, 골다공증, 관절염, 요통 등 인류의 진화 초기에 겪지 않았던 각종 질병으로 고통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바이바 크레건리드는 “모든 문제는 인간이 걷기를 멈추었을 때 시작되었다”(106-107쪽)고 경고하면서 “환경은 앉아 있는 행위와 강한 연관 관계를 가지며, 이 행위는 다른 질환들의 관문 질환이 된다”(443쪽)고 주장한다. 의자에 의지하는 몸으로 진화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몸은 움직일 때 살아나고 활력을 찾는다. 의자에 오래 앉아서 일할수록 의자왕(Chair Man)이 되지만 스스로의 의지로 미래를 개척할 강인한 체력은 현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의자왕은 의자에 앉아서 운동을 시작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운동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기 합리화가 강할수록 운동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함께 강해진다. "'어떻게든'은 눈물겨운 것이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142쪽). 이영광의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힘들어도 어떻게든 운동하기로 결심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내 몸에 도움이 되는 운동하는 방법도 찾아낸다. 어떻게든 운동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이 운동은 나의 하루 활동으로 점차 습관화되어 간다. 하지만 운동하지 않으려는 마음도 어떻게든 굳은 마음을 먹고 버텨온 결과다. “배워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우리는 하면서 배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이다. 운동을 시작하면 몸이 반응한다. 몸으로 다가오는 반응 속에 어제와 다르게 운동하는 방법이 숨어 있다.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찾아내는 요령이 아니라 시작하면 떠오르는 묘령의 묘책이다. 그런데 아직도 의자에 앉아서 안일한 생각만 반복한다.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의자에 의존하는 자신을 이길 수 없는 확률이 높아진다. 안락함을 안겨준 의자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 “박식한 학자의 책에서는 또한 거의 언제나 억누르고 또 억눌린 어떤 것이 느껴진다: 어디에선가 전문가의 티를 내는 것이다. 그의 열성과 진지함, 원한, 그가 앉아서 생각을 짜내는 구석자리에 대한 과대평가, 그의 곱사등에서-모든 전문가는 곱사등을 가지고 있다. 학자의 책은 또한 언제나 굽은 영혼을 반영한다. 모든 전문 수공업은 구부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잠언 366, 367쪽). 니체의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중에서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말이다. 앉아서 연구를 거듭할수록 등은 곱사등으로 바뀌고 뱃살은 늘어나며 몸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부실한 신체는 흐릿한 두뇌작용을 낳고 분명하지 못한 두뇌작용은 부실한 연구로 연결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만든다.
고통으로 단련되지 않은 몸은 통증을 유발하는 주범이다
앉아서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리는 혼탁해지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마음은 미적지근 쇠약해진다. 가급적 빨리 지금 직면하고 있는 문제 상황을 탈출할 생각에 깊은 사색과 사유보다 미천한 생각으로 임기응변할 묘책만 구상한다. 니체는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353쪽)고 하지 않았던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고민을 거듭할수록 건강한 생각보다 기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통념에 사로잡힌 각종 편견과 타성에 젖은 상식이 양산될 뿐이다. 몸을 움직여 힘든 고통을 경험해야 고뇌에 찬 결단애 후속되는 결연한 결행을 감행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몸이 일정한 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야 내성이 생기고 힘든 일도 버티고 견뎌낼 수 있는 내공도 생긴다. 스트레스를 받아야(stressed) 몸은 달콤한 디저트(desserts)를 먹을 수 있는 여유를 찾는다. ‘스트레스 받은’에 해당하는 ‘stressed’를 뒤집으면 놀랍게도 ‘디저트(desserts)’가 되지 않는가? 불편하거나 힘든 일은 기계에 맡기고 편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할수록 몸은 안락사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것이나 다름없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오래 앉아있을수록 요통을 비롯해 모든 질병의 온상이 생긴다.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오랫동안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직장인일수록 직장암을 비롯한 각종 성인병에 걸릴 확률도 높아진다.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세포조직도 점차 활기를 잃고 죽어간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점차 경직되고 세상과 하직하는 날도 가까워진다. 적당한 충격을 받는 몸이라야 강도 높은 충격을 견뎌내는 힘이 생긴다. 근육도 강도를 높여 쓰면 쓸수록 더 발달하고 아픈 만큼 새로운 근육이 생긴다. 뼈도 뼈아픈 충격을 적당한 강도로 받아낼수록 무게를 견뎌내는 힘이 생긴다.
고통 없는 몸, 고생하지 않는 몸일수록 역으로 다양한 통증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운동은 종류에 따라서 신체의 다양한 부분을 힘들게 만든다. 유산소 운동은 심장박동을 강렬하게 만들고 근육운동은 근육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강도를 높여가며 힘들게 만든다. “커다란 고통, 시간을 끄는 길고 오랜 고통, 생나무 장작에 불태워지는 고통만이 비로소 우리들 철학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지닌 궁극적인 깊이에까지 이르게 하고, 모든 신뢰와 선의, 부드러운 가식, 온순, 중용 등 아마도 우리가 이전에는 우리의 인간성을 쏟았던 것들과 결별하도록 만든다. 나는 그러한 고통이 우리를 더 낫게 만든다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더 심오하게 만든다는 것은 알고 있다”(28쪽).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의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생명체의 탄생과정에 따르는 고통과 성장하고 성숙하며 동반되는 고통, 그리고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진군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고통은 모두 몸을 관통하며 아픈 흔적과 얼룩을 남긴다. 변화와 혁신, 상상과 창조, 도전과 위기극복은 모두 머리가 아는 정신노동이 아니라 몸이 담당하는 육체노동이다. 고통스러운 육체노동 없이 경지에 이르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위대한 생명은 산모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 덕분에 얻은 소중한 작품이다. “우리는 차가운 오장육부를 가진 객관화나 목록화의 도구가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낳아야 하고, 어머니로서 피, 가슴, 불, 기쁨, 정열, 고통, 양심, 운명, 숙명 등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을 그 사상에 물려주어야 한다. 삶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것이고, 우리가 빛과 불꽃으로 변화시키는 모든 것이며, 또한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이다”(28쪽). 역시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의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스러운 몸이 진통을 거듭하면서 역사를 창조하는 전통 확립의 근간이다.
“커다란 고통을 가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자신 안에서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위대한 것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고통을 견디는 것은 최소한의 것이다……하지만 커다란 고통을 가하고, 고통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내심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며, 위대함에 속하는 것이다”(즐거운 학문, 잠언 325, 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