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살아온 인생의 고마움을 전하지 못해 사죄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덕분에 살아온 인생의 고마움을 전하지 못해 사죄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사람, 힘들어진 사람,
괴로움에 처한 사람,
그리고 밤하늘의 빛나는 별보다
어둠 속의 절망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의도와 다르게 전하고자 했던 말의 의미가 왜곡되고
이해보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이전보다 더 좋지 못한
관계의 끈이 생기게 된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도 사죄합니다.
침묵의 아우성과 함께 보이지 않는 발버둥을 쳐도
그 떨림에 울림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쳐온 뒤안길을 생각해보니
참으로 인간적 도리를 하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간절한 도움을 요청해도
귀 기울여 들어보지도 않고 무시하며
내 갈 길에 바쁜 나머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주변을 돌보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깊은 동면의 시간을 스스로 일깨우며
이른 봄 생명의 약동을 몸소 보여주는
수많은 초록의 향연을 주도하는 나뭇가지와 풀들에게도
귀 기울여 노고를 치하하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이른 봄부터 편치도 않은 땅에 뿌리내리며
뙤약볕도 고사하지 않고
비바람과 천둥번개 맞으며 자라다
자기 무게에 견디지 못하고 고개 숙인 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흩날리는 낙엽의 정처도 물어보지 않고
무심결에 밟고 지나온 오솔길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점,
빗물에 젖어 낮은 포복 자세로 엎드려 절치부심하는 낙엽에게도
안부를 물어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 온 죄를 사죄합니다.
낮은 바람에도 힘겨워
허리까지 흔들리며 꿈을 놓지 않으려는 갈대들,
마지막 씨 과실을 매달고 버티는 앙상한 가지의 안간힘,
이슬방울의 무게에도 몸이 휘어지며 자기중심을 잃지 않는 풀잎들,
흐르는 물결에도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조약돌에게
나는 한 번이라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해준 고마움을 잊고
무관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깊은 사죄를 드립니다.
한낮에 저지른 죄과를 덮어주고
긴 밤의 적막을 달래기 위해
머뭇거림 없이 달려와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고
잠 못 자고 뒤척이는 내 몸을 쫓아다니며
나를 덮어주는 이불에게는 한 없이 미안한 마음을 염두에 두고
한 번이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주지 못해서 사죄합니다.
어둠의 장막을 뚫고
밤잠을 설치면서도 적막한 밤을 번역해서
동트는 희망의 새벽이 잉태하는 언어로
기적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는
밤의 적막이 사투를 벌이는 노고에도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허리,
양치질을 하고 운동하고 밥 먹게 만들어주는 손,
어디론가 이동하며 걸을 수 있는 발,
맛난 음식을 먹는 입과 소화시키는 위,
그리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분투노력하는
오장육부와 다양한 기관들에게
내 몸의 주인으로서 깊이 감사드리고
고마움을 잊은 채
내 몸을 함부로 대하는 죄과에 대해
마음 깊이 사죄합니다.
알량한 앎으로 복잡한 세상을 재단하고
깊이 없는 사색의 샘물로
사유하는 삶을 채색해야 한다고
느닷없이 주장해온 근거 없는 신념과 관념적 가르침을
깊이 반성하며 사죄합니다.
힘든 노동의 대가로 얻은 우유 한잔과
매일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낳은 계란 한 개,
척박한 땅 위에서 험난한 들판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거둬들인 두유 한 잔,
사계절의 기운을 받으며 식탁 위에서
누군가의 식사를 위해 기다리는 오곡백과들,
그리고 들판의 풀을 뜯어먹고
미련 없이 고기를 선물해준 수많은 동물들,
나는 오늘도 죄 없는 동식물에 무차별 폭력을 가하며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있음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아침이면 변함없이 일출의 꿈을 전하며 세상을 밝히는 햇빛과
뜨거운 열기로 피곤해진 몸을 식혀주는 바람,
하늘의 종이 삼아 삶의 순간을 포착해서 그려주는 구름의 그림,
메마를 대지의 갈등을 순식간에 식혀주는 소낙비,
새벽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게 만들어주는 안개에게도
고마움을 전하지 않고 생각 없이 살고 있음을
깊이 사죄합니다.
힘들 때 아무 때나 앉아서
무거운 체중으로 짓눌러도
묵묵히 잠깐 동안의 휴식을 안겨주는
공원이나 동산의 벤치나 의자에게도
한 번이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주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지저분한 쓰레기를 다 집어넣어도
불평불만하지 않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쓰레기통에게
한 번이라도 미안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음을 사죄합니다.
언제 어디를 가도 묵묵히 나의 발이 되어준 신발
거친 들판 길을 달려가도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도
돌부리 넘쳐나는 자갈밭을 거닐어도
짠물에 젖어든 모래 위를 산책해도
걸어갈 길 마다하지 않고
이정표를 향해 오늘도 여기까지 함께 해준
신발의 노고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음을 사죄합니다.
괴로운 삶의 노동만큼 읽히는 책을
저자들의 삶만큼 살면서 고뇌하지 않고도
그 책을 다 읽어내려는 안간힘을 쓴 지난 시절의 애쓰기가
나의 글쓰기로 연결되기를 바랐던 허망한 바람에 대해 사죄합니다.
행간을 사이에 두고 생성되는 무수한 사유의 계곡에는
차마 문장 안에 담아낼 수 없는 또 다른 생각의 파편들이 굴러다니며
저마다의 위치에 멈춰 서서 색다른 사고를 잉태하고 있지만
그것도 모르고 또 다른 문장으로 성급히 달아나려는
읽기에 바쁜 지난날의 독서에 대해서 사죄합니다.
겨울 기운이 스며들기 전 흔들리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로수 행렬에 나란히 피어있는 코스모스는
혼돈 속에서도 코스모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봄날의 이른 꽃샘추위도 견뎌내고
한 여름의 느닷없는 천둥과 번개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을의 향연을 즐기러 왔건만
나 그것도 모르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싣고
어딘가로 질주하며 매몰되어가는 삶에 깊은 사죄를 합니다.
뜨거워진 몸체를 식힐 시간도 주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손가락으로 따귀를 맞으며
입력하는 글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장을 완성하고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하는
컴퓨터는 늘 그 자리에서
오늘도 주인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컴퓨터의 중노동을 치하해본 적이 없어서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느닷없이 날아드는 아이디어를 붙잡아 매고
지금의 아이디어가 다른 생각을 만나
잉태한 또 다른 아이디어도
휘발성이 강하기에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지만
골목길을 헤매며 목적지를 찾다가
천만다행으로 지나가는 뜻밖의 행인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각의 끝자락에도
깊은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없어서 사죄를 합니다.
하지만
볼펜과 만년필 그리고 연필 덕분에
사라지려는 생각의 파편들이 하얀 메모지 위에서
주어가 목적어를 불러다 놓고 알맞은 동사를 찾아
용서받지 못한 채 힘겹게 살아온 삶을 번역해
추억의 한 페이지를 어둠 속에 새겨둡니다.
이 글은 이기철 시인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성했음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