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아부지

어렸을 적, 아부지는 나의 달리기 라이벌이었다.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시합을 제안했고, 아부지는 단 한 번도 져주지 않았다.
그는 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었고, 내가 넘고 싶은 산이었다.


그 수많은 도전 속에서 아부지는 가끔 귀찮은 티를 냈지만, 대충 져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늘 진심으로 이겼고, 늘 한마디만 남겼다.

“더 커서 와.”


초등학교 2학년, 나는 학급 대표로 계주가 되었다.

당연히 이 소식을 나의 달리기 라이벌에게 전했다.

"아부지, 아부지! 나! 계주 됐다!!"

"말도 안 돼. 네가? 너 엄청 느리잖아! 너네 반 그러다가 꼴등 하는 거 아냐?"

"아니라니깐!! 나 진짜 빨라!! 아부지 오늘 나랑 한판 떠!!"

"그래 좋아!"


그날의 대결 장소는 동네 영화 대여점 앞 인도,

결승선은 영화 대여점 간판이었다.

"아부지! 정정당당하게 해야 돼!"

"당연하지. 몸 너무 앞으로 쏟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결승선만 바라보며 달렸다.

계주 선발전보다 훨씬 열심히.


그리고.. 결과는 정말이지 놀라웠다.

무 승 부

정확히, 동시에 들어왔다.

혹시 몰라 재대결도 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아부지와 나는, 용호상박이었다.


"야.. 진짜 빨라지긴 했네. 이제 얼추 아빠랑 비슷한데?"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내가.. 아부지랑 비슷해?


9년 인생동안 이렇게 뿌듯한 적이 있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말해찌!! 나 엄청 빠르다고!"

난 성장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이 놀라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순 없었다.

곧장 전교 1등이자 나의 베프,

땡칠이에게 알려야 했다.

"나 땡칠이 집에 갔다 올게!!"


그대로 땡칠이 집에 달려가

숨을 헐떡이며 초인종을 눌렀다.

"저 땡칠이 친구 키봉인데요! 땡칠이 집에 있어요?"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맥락도 없이 외쳤다.

"나 진짜..!! 대박인 일 있었어!!"


나는 그날의 시합 결과를 자초지종 설명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땡칠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너 그걸 믿는 건 아니지? 딱 봐도 너네 아부지가 일부러 살살 달리신 거잖아."

무슨 말인가 싶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얘기였다.

"네가 우리 아빠를 몰라서 그래. 우리 아부지는 나 절대 안 봐줘.

그리고 아부지, 살살 안 달렸어. 넌 보지도 못했잖아. 난 봤어. 아부지도 헉헉댔어!"

"다 연기하신 거지. 너 계주 됐다니깐, 기분 좋으라고."

억울했다.

넌 내 친구면서, 왜 내 성장을 안 믿는 거야.

"두 번이나 했는데 두 번 다 막상 막 하였다니깐?!"

눈물이 핑 돌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9살의 나는 아직 눈물샘 조이는 법을 몰랐다.

울먹이는 나를 보며, 땡칠이는 다소 망설이다 말했다.

"너 빠른 거 알아. 난 너 한 번도 못 이겨 봤잖아. 근데.. 근데 말이야.."

땡칠이는 마치 상식이라는 듯 꾹 눌러 말했다.

"9살 여자 아이는, 성인 남성을 이길 수 없어."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성인 남성"

나는 그 단어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 집에 갈게"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땡칠이에게 전화가 왔지만

듣고 싶은 말은 한 줄도 없었다.

안타깝지만 그게 진실이니 받아들이랬다.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게 사실이랬다.


재수 없는 놈.

난 아빠랑 정정당당히 달렸고,

진짜 비겼다고.

지는 달리기 짱 느리면서. 부러워서 저래 괜히. 부러워서.

느린게 뭘알아?


앙칼진 머릿속과 달리

나의 베갯잇은 속절없이 젖어갔다.



그날의 나는 얼마나 억울했던 걸까?

27살인 지금까지도 장면들이 선명히 떠오르는 걸 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긴 했나 보다.


이제는 안다.

그때 아부지는 날 봐준 게 맞다.

그리고 땡칠이는..

초2가 어쩜 그리 똑똑했지?


그날은 땡칠이가 죽도록 미웠지만

지금은 고맙기만 하다.

덕분에 나는 약 20년 동안 강렬히 이 사건을 기억하게 되었고

이렇게 글까지 남기니 영원히 잊지 않을게 분명하다.


눈을 감고,

땡칠이 덕에 그 어느 날보다 선명한

그날의 출발선 앞에 선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영화 대여점만 노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날의 아부지를 본다.


속이는 대로 속았던, 순수했던 나의 과거

그리고 그런 나를 성실히도 속이며 놀아주던 아부지.

목적지만 바라보며 뛰고 있던 나와 달리

나를 보며, 보폭을 맞췄을 아부지.

너무 우쭐댈까 져주지도, 혹여나 기죽을까 이기지도 않고

정확히 비겨주기 위해 노력했을 아부지.

장난기 가득한, 30대의 젊은 아부지.


그렇게 다시 한번

그때는 미처 보지 못한

그날의 아부지를 본다.

나를 키워낼, 어린 나의 아부지를 본다.


그날의 무승부는, 나만 몰랐던 사랑이었다.






번외1

난 진짜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빠른줄 알았다.

옛날에 올림픽을 보는데, 우사인 볼트가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라는 설명에 나는 이렇게 물었다.

"아빠보다?"


번외2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이후 계주를 한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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