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마주한 집에 내 일상을 맡기고, 이어지는 삶.
이천십오 년 봄, 서울에 왔다. 목련이 흐드러지게 필 무렵의 일이다. 해방촌 언덕의 쓰리룸, 부모님 집을 떠나 처음으로 살 게 된 곳이었다.
학교 후배는 반년 동안 서울을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반년 후, 이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었던 그 친구는 내게 ‘집’을 부탁했다. 월세 오십칠만 원. 고향 친구와 함께 반년 동안 그 집에서 살았다. 봄이면 매화가, 여름이면 무궁화가, 가을이면 감이 열리던 집의 앞 집이었다.
반년 후 예정대로 학교 후배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와 그 집에서 일 년 반을 더 살았다. 이천십칠 년의 시작과 함께 해방촌을 떠났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과 수영장을 오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활이 이어졌다. 이천십칠 년 여름이었다.
때마침, 대학 동기가 타국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다시 서울에 갈 요량으로, 친구와 함께 선릉역 근처의 반지하 투룸을 구했다. 2000/67. 그 집에서 첫 삼 개월을 친구와 함께 살았다. 삼 개월을 살더니 친구는 다시 타국으로 떠났다. 삼 개월 뒤에 돌아온다는 편지를 남기고. 삼 개월 뒤에도 친구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집에서 계약 기간 일 년을 채우고 나왔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다. 보증금 없이 오래 살았고, 고작 일 인분의 삶을 살면서 친구의 원조와 함께 이 인분의 삶을 살았다. 넓고, 풍요로웠다. 무엇보다도 ‘집’ 다웠다. 거실이 있고, 부엌이 있고, 방이 있었다. 집 안에 화장실 문 말고도 다른 문들이 있었다. 공간과 공간들은 분리되어 있었고, 각 공간에 맞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혼자 살 집을 찾아야 했다. 이천 십팔 년 여름이었다.
집을 구하기 전, 집을 보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첫 번째 : 분리형일 것.
두 번째 : 직장과 멀지 않을 것.
세 번째 : 2000/60을 넘지 않을 것.
네 번째 : 지하가 아닐 것.
무수히 많은 집을 보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네 가지에 전부 다 맞는 조건의 집은 딱 한 곳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집을 계약하지 않았다. 묘한 느낌이 들어서. ‘이곳이다!’가 아니라, ‘여... 기...?’의 뉘앙스. 영화에 나올 법한, 애매하게 생긴 복도식 빌라였다. 집 내부조차도. 여기서 살게 된다면 영화의 주인공이 될 것 같았다. 해피엔딩 영화 말고, 그런 거 있잖아. 피 냄새 진하게 나는 느와르?
그러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게 됐다. 그 당시 다니던 직장과 멀지 않으면서, 지하가 아니고, 2000/60을 넘지 않는 곳. 네모난 정사각형의 방이었다. 집 내부에 문이라고는 화장실 문, 하나뿐인 그런 곳. 블라인드를 다 올렸는데도, 날씨가 맑았는데도, 햇빛이 어설프게 들었다. 하지만 넓었다. 거실 같은 방. 가장 첫 번째 조건인 ‘분리형’을 포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일 인분의 삶을 살기에 딱 좋아 보였다. 분리형이 아니라는 게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이 집을 세 번 보았다. 삼고초려한 꼴이지 뭐. 결국 계약을 했다. 이천 십팔 년 칠월의 일이다.
벌써 이천 이십일 년. 이 집에서 세 번째 사계절을 보내게 됐다. 계약할 때는 이렇게 오래 살 게 될 줄 몰랐지. 분리형을 포기하고 얻은 나의 아늑한 방. 이 집이 너무 편안하지만, ‘다음번 집은 분리형에서 살 수 있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여전히 잘 지낸다. 그런데, 다음이 있을까? 있겠지 뭐~
이천 이십일 년 칠월. 이 집과 함께 한지 사 년 차가 될 무렵, 계약서를 갱신하고 돌아온 날. 몇 달 전에 적어 둔 에세이를 다시 읽고 수정하면서, 이 집과 함께 보낸 시간을 되새김질해본다. 2000/60에 닿을락 말락 하던 월세는 이제 2000/60에 꼭 맞게 되었고, 그동안 보낸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앞으로 얼마간 이 집에서 더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미래의 기억들까지도 꼭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