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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l 06. 2021

잠이 오면, 그제야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

그땐 그랬고, 지금은 이렇고.

     전 직장 이야기를 지루하게 좀 해보려고. 나는 열 번의 계절이 지나는 동안 지하에 있었어. 빛이 들어오지도, 환기가 되지도 않았지.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알 수 없었어. 이따금 맑고 졸린 날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낮은 곳에서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갔어. 그제야 ‘아, 봄이구나.’, ‘어, 벌써 여름이네.’, ‘헐, 가을이야’, ‘미쳤어, 눈 온다.’를 내뱉고는 했지.


     면접을 볼 때, ‘열 시에 출근을 하고 여섯 시에 퇴근을 한다’고 했어.  규칙이 있기는 했는데, 그 규칙대로 살 수는 없었어. 어떤 날은 더 일찍 퇴근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그냥 거기서 잤어. 그러려니 했어.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니까. 참 웃기지? 원래 그런 곳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우습게 그냥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열 번의 계절을 지나왔더라.


     매일 잠이 부족했어. 어떤 달은 한 달에 하루를 쉬었더라고. 아침 열 시에 출근을 하고 새벽 네 시쯤 퇴근하면서 말이야. 나는 걸어서 퇴근했는데, 점점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날이 늘더라. 어쩌다 쉬는 날은 시간이 아까워서 잠을 못 자겠는 거야. 잠을 자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가니까 그게 싫어서. 어기적어기적 나갔다가 들어오면 그런대로 하루가 다 가버리더라.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더라고.




     출근하면 출근 인사처럼 커피를 내려 마셨어. 일어났는데도, 잠이 자꾸 나에게 달라붙어 있었어. 커피를 반쯤 마시면 그제야 잠이 나에게서 떠나간 것 같더라. 점심을 먹고 오면 또 잠이 찾아왔어. 그럼 또 커피를 내려 마셨어. 때때로 커피를 들고 옥상에 올라갈 때면, 옥상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 나처럼 커피를 손에 쥐고서. 다들 눈에 졸음을 한가득 묻히고. ‘다들 나랑 같겠지, 남의 돈 벌어먹기 참 어렵다.’ 하면서 먼 곳을 바라봤어. 시선 끝에 도봉산이 걸리더라. 한참 멍 때리며 도봉산을 보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들 먼저 내리고 마지막에 내리는 건 언제나 나였어.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올라왔으니까.


     옥상의 시간을 제일 좋아했어. 적당히 몽롱하고 날씨는 맑고. 아무도 말 시키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그냥 나 혼자 멍하니 도봉산을 바라보다가 햇빛을 잔뜩 머금은 채, 햇빛 하나 없는 곳으로 가는 거야.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낮아질수록 기분도 낮아지더라. 그렇게 열 번의 계절을 잃어버렸어. 내가 잃어버린 계절에서, 나도 같이 잃어버렸지 뭐야. 때때로 나를 찾을 수 있는 순간순간마다 계절을 느꼈던 것 같아. 잠이 쏟아지는 순간 오히려 잃어버린 나를 찾다니, 참 이상하다 그치?


     이제는 더 이상 맑은 날의 옥상에서 도봉산을 바라보지 않아.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습관은 여전하지만, 잠이 쏟아질 때가 다 돼서야 계절의 변화를 눈치 채지도 않아. 흐린 날에도, 맑은 마음과 맑은 정신으로 계절을 걷고 있어. 온몸과 온 마음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말이야.


     이제는 잠이 쏟아지는 순간이 돼서야 잃어버린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매 순간 그냥 나는 나로 잘 지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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