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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Dec 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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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가는 거 맞지?”


우리 앞에서 걷던 유리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응. 맞아. “


나리가 대답하며 유리에게 다가갔다. 나는 멀어지는 나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놀랍게도 나는 나리와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괜히 으쓱해져,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호열이를 괜히 밀쳤다.


“왜 그래?”


“아니, 날이 좋잖아.”


“좋기는 무슨, 바람만 겁나 부는구먼.”


“쟤들 기다린다. 빨리 가자.”


나는 울적해 보이는 호열이를 격려했다.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일요일 정오의 놀이공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롤러코스터가 휘어진 레일을 따라 우리의 시야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이 바람을 타고 귀로 흘러들어왔다. 비록 조금 오래된 놀이공원이긴 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우리는 짝을 지어 범퍼카, 바이킹, 이름 모를 회전하는 컵, 롤러코스터를 탔다. 짝은 물론 여자 둘, 남자 둘이었다. 나나 호열이에겐 지금에 와서 짝을 바꾸자고 이야기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래도 재미는 있었다. 대개 여자아이들이 우리보다 앞 좌석에 탑승했는데, 롤러코스터나 바이킹같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탈 때 그녀들이 내뿜는 비명과 손동작은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범퍼카는, 뒤에서 나리의 차에 꽈당 충돌하는 게 참 재미있었다.


어느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배고픔을 나만 느낀 건 아닌 듯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


호열이의 말에 유리는 나리를 쳐다봤다.


“너는 어때?”


“나도 배고파.”


나리는 매우 밝게 대답했다.


”그럼 점심으로 뭘 먹으면 좋을까?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식당가가 있다는데…. “


이호열이 우리에게 열심히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는 동안 나리가 살며시 손을 들었다. 우리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나리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도시락을 싸 왔어. “


나리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깨달았다. 오늘 내내 나리의 손에 들려 있었던 종이 가방의 존재를. 터미널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놀이동산을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햇살이 번지는 수원지를 걸을 때에도,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종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놀라운 점은, 분명 나는 가방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그녀에게 가방에 대해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던 걸까. 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있는 그녀에게 대신 들어주겠다는 제안이나, 아니면 무겁지 않냐는 걱정하는 말 한마디 할 생각조차 못 했던 걸까. 유리는 내 생각을 읽고 있는 듯이 연민인지, 경멸인지 모를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거 때문에 나리 오늘 엄청 일찍 일어났어.”


 그녀의 말은 비수가 되어 나에게 꽂혔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우리는 놀이공원에서 조금 떨어진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나무와 벤치가 예쁘게 조성되어 있어서 충분히 피크닉을 즐길 수 있을 만한 곳이었다. 호열이가 어디에선가 잽싸게 돗자리를 구해 왔다.


아까도 말했지만, 놀이공원과 휴게공간은 호수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 내리막에서 호수에 열차가 처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었고, 바이킹을 타면서도 호수에 던져지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었다. 잘 만든 놀이공원이었다.


다만 그날은 조그만 문제가 있었다. 놀이공원에 바람이 꽤 많이 불었다. 놀이기구를 타러 온 사람들에게 바람은 그렇게 신경 쓰이는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원지라는 곳 자체가 날씨 좋은 봄이나 가을이 가장 대목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놀이공원을 방문했을 때는 1월 말, 한겨울의 중심을 지나는 시기였고, 높이 떠오른 태양이 무색하게 앙상한 나무를 헤집으며 달려드는 바람은 매서운 존재감을 발휘했다.


특히나 돗자리를 깔기 위해 노력하는 나와 호열이에게 바람은 조그만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정오에 가까워져 조금은 풀린 날씨와는 반대로 바람은 여전히 쌩쌩 불었다. 자리를 펴려고 하면 바람은 짓궂게도 돗자리를 날려버렸다. 우리는 몇 분을 고생하며 겨우겨우 자리를 폈다. 아니 자리를 폈다기보단, 돗자리를 고정하는 생체 핀이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묘사일 테지만. 나와 호열이는 남은 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리와 유리 또한 자리 잡는데 많이 고생을 했다.


“왜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부는 거야.”


나리가 겨우 자리에 앉으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녀는 돗자리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위에 도시락이 들어있는 종이가방을 올리고, 양손으론 손잡이를 꼭 쥔 채로.


여자들은 머리가 길어서 바람이 불면 참 귀찮겠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돗자리 중앙을 손으로 쓸었다. 바람 때문에 부러진 잔가지들이 돗자리 위에 있었다. 나리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대충 정리가 된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돗자리 가운데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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