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용민 Dec 21. 2023

15

9

2월 14일이 도래했다. 나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날에 대해 신경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학원에 갈 채비를 했다. 학원에 도착해서도 평소와 별로 다를 건 없었다. 수업 시작 전 남자 놈들끼리 동네 친구 누구가 누구에게 초콜릿을 줬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아, 오늘이 밸런타인데이구나 하는 정도가 다였다.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다. 과학 선생님이 수업 중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고, 혹시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있냐는 장난스러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 것 외엔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다. 하원을 할 시간이었다. 오늘은 같은 반 남자 놈들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곧 선행학습 반도 끝이나고 다시 반이 배정될 텐데, ‘그 외 고등학교 반’ 멤버들끼리 나름의 종업식을 하자는 말이 나왔다. 남주가 제안을 했고, 우리 모두 동의했다. 사실 남자들 전부라고 해 봤자 일곱 명이 전부였기에, 의기투합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선행학습 과정을 함께 들으며 서로 꽤나 친해지기도 한 터라 저녁 식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호열이가 학원 근처에 감자탕이 끝내주는 집을 안다고 했다.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자리를 떴다. 서로 조금 친해진 아이들끼리는 “오늘 재미있겠다.” “너도 갈래?” 같은 대화들이 오고 갔다. 남자 녀석들은 서로 와글와글 떠들며 수학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러 간 남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옆 분단을 슬쩍 쳐다봤다. 다른 여자아이들 모두가 강의실은 나섰는데, 나리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이제서야 필기구를 챙기고 있었다. 출구를 바라보니 나리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한 유리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다시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리가 강의실을 나섰다. 찰칵, 문이 닫히며 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다시 벌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남주가 돌아왔다.


“너무 늦었잖아, 인마.”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남주를 비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남주에게 비난 한마디를 얹으며 가방을 둘러멨다.


“본우야.”


남주가 나를 불렀다.


“응, 왜?”


녀석은 무언가를 자신의 책가방에 집어넣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리가 너 좀 보자는데?”


삽시간에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남주에게 다시 물었다.


“왜?”


“나야 모르지. 나가봐 어서.”


녀석은 빨리 나가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며 나를 채근 했다.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채로 강의실 밖을 나왔다. 저기 멀리 나리와 유리가 보였다. 유리는 내가 나온 것을 확인하더니, 나리에게 무어라 귓속말하곤 먼저 자리를 떠났다. 강의실 복도에는 나와 나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괜히 어색해졌다. 이렇게 둘이 서로를 쳐다보는 건 어린이 대공원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색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쭈뼛거리며 나리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종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불쑥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괜히 얼떨떨 해져 그 손을 가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나리가 채근하듯 말했다.


“받아.”


나는 선물을 처음 받아보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손을 내밀어 나리의 손에 놓인 무언가를 건네 받았다. 선물을 받았으니 고맙다고 해야지. 머릿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고, 나는 순응했다.


“고마워.”


나는 뻗은 손을 부자연스럽게 유지한 채 말했다.


나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갈 곳 잃은 내 시선은 방황했고, 나는 부끄러움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용기를 내서 나리를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눈을 돌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크고 맑았다. 이러다 얼굴이 먼저 터져버리겠는데. 걱정이 들 때쯤, 나리가 비로소 입을 뗐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야.”


“아, 응. 그렇다더라.”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려보았지만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더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져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입을 떼면 어버버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다시 침묵이 흘렀고, 나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재미있게 놀아.”


그러고 그녀는 몸을 돌려 가버렸다.


나는 몽롱해진 기분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내가 다시 들어오자, 여지저기서 낮은 음정의 환호소리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특정하기 힘든 원순모음의 소리가 강의실 벽에 부딪히며 공명했다. 덕분에 나는 내가 3개로 보이던 세상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남주와 호열이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등을 퍽퍽 내리쳤다. 다른 녀석들도 다가와서는 한마디씩 거들며 팔뚝, 등, 가슴 등등을 밀쳐댔다. 그것은 흡사 어릴적 영화 속에서나 본 승전한 장군을 맞이하는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나리가 준 선물은 두 가지였다. 빨간 글씨로 서울우유라고 크게 적힌 초코우유와, 그 우유갑 뒤편에 붙어있는 편지 모양의 쪽지. 학원에서는 친구들의 눈이 너무 많아 읽지 못한 편지 말이다. 급하게 뒷주머니에 밀어 넣었던 쪽지는 저녁시간 내내 바지 뒷주머니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고, 나는 감자탕집에서부터 한쪽의 엉덩이가 이상하게 감각이 예민해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날 감자탕집의 주인공은 나였다. 친구들은 내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야유와 환호 그 어딘가에 위치한 소리를 계속 내뱉었고, 그 소리는 그날의 웃음벨이 되어 모두를 즐겁게 했다. 그래, 너희가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거야. 나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매우 우쭐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저녁식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뒤통수 너머 들리는 야유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호열이와 함께 다른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다들 짝을 지어 집으로 향했다. 무리가 뿔뿔이 흩어지고 인적없는 거리에 들어서야, 나는 쪽지를 열어 볼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상하게 말이 없는 호열이에게 나는 쪽지에 대해 말했다. 녀석은 내게 어서 읽어보기를 권했다.




안녕, 본우야. 나 나리야.
오늘 밸런타인 데이래, 알고 있었어?
그날 도시락은 미안했어.
다음번에 또 같이 놀러 갈 수 있으면 좋겠어.
그때는 꼭 따뜻한 김밥을 싸갈게.

P.S. 우유 많이 먹으면 킥다 쑥쑥 클 거야. 걱정하지 마.



나는 다 읽은 후에도 편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다 읽었어?”


호열이가 기다림에 지친듯 나에게 물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편지를 건넸다. 녀석은 번개같이 편지를 받아 들었다. 잠시 후 녀석은 편지를 다 읽은듯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좋겠다 인마.”


호열이는 내 등을 툭 하고 쳤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댔다.


“아니, 키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키가 작은건 나도 안다고. 하지만 난 이제 17살이니까 충분히 더 클 수 있잖아. 너도 알다시피 난 이제 크기 시작했잖아.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해서 괜히 내가 계속 키가 작을 것 처럼….”


“인마 이거 얼굴 빨개진 거 봐라. 키 크기 전에 네 얼굴이 먼저 터지겠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놀랍게도 꿈만 같은 나의 첫사랑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가 된다. 고등학교라는 새로운 장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나는 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 한 명이 없는 학원을 굳이 다닐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과, 내신보다는 수능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큰 부분을 차지했다. 집에 말씀을 드렸더니, 부모님께서도 동의하셨다.


결정을 내리며 나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십 대 시절이란 대학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순진한 소년이었다. 그런 나에게 내가 나리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라든가, 그녀와의 관계 같은 것들은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일 뿐이었다.


그 결과 나리와의 관계 또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물론 학원을 그만둔다고 해서 그녀를 만날 수 없었던 건 절대로 아니었다. 만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우리는 충분히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논리로 나는 학창시절 내내 휴대전화를 만들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그녀의 전화번호라든가 미니홈피 주소 같은 걸 알고 있지 못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변명이냐고? 맞다. 사실 이건 터무니없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 모든 건 내가 휴대전화가 있고 없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였다.


좋아한다면 표현해야 한다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그런 기분 아는가?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기분. 분명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지만, 아무리 용기를 쥐어짜내도 손을 움직일 수 없는 그런 기분말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명 그녀를 계속 보고 싶었다. 함께 공원을 걷고, 함께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녀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지 못했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집 전화번호를 알려줘야 할텐데, 그럼 부모님이 아시게 되겠지? 내가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겠지? 물어봤는데 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는 나리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을까? 괜히 그녀 책상 근처를 자주 지나다니고, 그녀가 타는 승강기를 함께 타고, 그녀가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까지 걸어도 가 봤지만,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학원을 그만둔다는 사실은 호열이 이외에는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나는 담당 선생님에게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왜 그녀가 나에게 연락할 방법 하나를 물어보지 않는지 섭섭해하기만 했다.


찌질한가? 맞다. 엄청나게 찌질한거.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시절의 나는 그랬던 것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사람의 미숙함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호열이와 유리도 그날 이후로 굉장히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내가 나리에게 초코우유를 받은 날, 유리는 선생님을 뵙고 강의실로 돌아오는 남주에게 초콜릿을 건네주었다. 남주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거절했지만 유리는 남주의 손에 초콜릿을 밀어 넣었고, 녀석은 어쩔 수 없이 손에 네모난 선물 상자를 들고 우리가 있던 강의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이 사실을 호열이로부터 알게 되었다. 녀석은 남주와 아주 친한 종현이 녀석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물론 종현이는 호열이가 유리를 좋아하는지는 꿈에도 몰랐겠지. 그건 나와 녀석만의 비밀이었으니까. 말을 하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호열이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게 실연이라는 최종 선고를 받은 녀석은 유리를 위해,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마음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앞으로 본인은 대입만을 생각하며 3년을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분명히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위로했다. 녀석이 진학하는 학교는 남고이긴 했지만…. 딱히 그 말 이외엔 해줄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전 13화 1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