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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Dec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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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비교적 수월하게 끝이 났다. 나는 담당자분과 마무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경비 아저씨에게 기분 좋게 인사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돌아오는 길은 헤매지 않았다.


사무실로 복귀한 후, 별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땡. 시계가 퇴근 시간을 모두에게 알렸다. 눈치를 보던 나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내일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서로에게 인사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띵. 엘리베이터가 주차장에 도착했다. 저 멀리 내 차가 보였다. 운전석에 앉아, 후. 한숨을 한번 내뱉었다. 시동을 걸었다. 날씨가 더우니 건강 조심하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휴대전화를 연결했다.


열심히 도로를 달렸다. 계속 달리지는 못했다. 달리다가, 섰다가, 기어가다가. 다시 섰다가 달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확실히 퇴근 시간에 운전한다는 건 그렇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뭐 해야지 어쩌겠어. 집은 가야 할 거 아냐.


줄기를 잘라낸 나무는 뿌리부터 다시 새로운 줄기가 돋아서 나온다. 왕성한 성장의 시기에 받은 상처는 겉보기엔 나무에 아무런 문제를 주지 않지만, 사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불과할 뿐, 결코 나무는 상처 입기 전의 나무가 될 수는 없다.


나도 그랬다. 수레바퀴에 짓눌린 것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흔적을 남기기 마련인 것이다. 내 몸과 마음과 삶에 말이다. 너도 상처를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이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겠지.


머리를 흔들었다. 운전을 하면 자꾸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집에 도착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교통체증에 온몸에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주차장에 공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속으로 욕을 잠깐 했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풀었다. 알림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하루가 끝났다. 발로만 구두를 벗었다. 구두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널브러졌다. 가방을 책상 위로 던지고 드러누웠다. 거실바닥은 차가웠다. 눈을 감아보았다. 10초만 주면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쯤은 안 씻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루쯤은 양말 신은 채로 잠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괜찮지 않았다. 씻어야 더 개운하지. 몸은 조금 더 누워 있자며 비명을 질러댔지만 나는 기어코 일어섰다.


저녁엔 보통 샤워를 30분 정도 한다. 꽤 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30분 내내 몸을 씻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그냥 서서 물을 맞는다. 온수가 몸을 타고 흘러내릴 때의 기분이 참 좋다. 몸 가득 퍼지는 나른함과 개운함. 수도꼭지를 돌렸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내 몸에 닿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수능을 치고 대학에 진학했다. 공부에만 집중하겠다고 휴대전화도 만들지 않는 등 온갖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렇게 성적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이거론 성공할 수 없겠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든 날 든 생각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절대 아니라고, 이건 시작일 뿐이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1년 동안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확히 반대였던 걸요. 마음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걸 꾹 참은 채, 선생님께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30분 정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경청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인생 처음으로 마주했던 큰 관문이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이 시련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시험의 결과는 결국 내가 쌓아 올린 노력의 결과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의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오롯이 책임지는 것,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굳이 변명해 보자면, 결국 그 목표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세워졌느냐가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그 시절 나의 주위에서는 수능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신경 써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다. 집에서는 물론이었고,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도 사촌 누구는 전교에서 몇 등을 했다더라 하는 말이나, 누구는 올해 서울대에 갔더라는 말 밖엔 들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철저하게 다른 것을 경험해 볼 기회를 배제당한 채 그냥 공부라는 것만이 인생에서 해야 할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오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런 데 너만 왜 그랬냐는 말에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나는 그랬다. 결국 공부라든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이런 것들 모두가 내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받아들여진 목표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그것은 바로 스스로 생각하고 결심하지 않은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노력이라는 것은 결국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니까. 수능을 망친 사람의 비겁한 변명으로 들리는가? 당신이 맞다.


물론 이런 생각을 수험생이던 내가 하지는 못했다. 어쩌겠나. 목적지가 없었던 기차가 선로에서 이탈해 버린 것이다. 탈선한 열차에 친절히 다음번 목적지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런 건 존재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의 경로는 내가 정해야 하는 것이니까. 결국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살아온 나는 그때도 똑같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씀대로 성적에 맞춰서 내가 바라는 곳과는 조금 달랐던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예비 소집을 가는 날에도 탈선한 열차가 된 것 같은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꽤 시간이 들겠는데. 이런 감정 상태로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반대로 학기가 시작되자 우울한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대학은 말 그대로 별천지 그 자체였다. 새터, OT, 축제…. 별별 행사와 모임들이 많았고, 신입생이었던 나와 동기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우리도 역시 수험생활 동안 억눌려 왔던 무언가를 분출하고자 열심히 활동했다. 재미있었다. 가끔은 작년과 너무도 다른 내 생활에 스스로 의아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에이 뭐 어때. 대학생 들어가면 놀라고 했잖아. 어른들이 항상 했던 말을 되뇌며 걱정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만 생각해 보면 정말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작년의 나는 어떤 연유로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에 가고, 별을 보며 집에 가던 생활을 했는지. 지금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정오까지 잠을 자고, 해가 뜨는 걸 보며 술자리를 파하는 생활을 하는지. 작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다르길래 이렇게도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들 때도 잠시뿐, 나는 어느새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다시 밖을 나가곤 했다.


정신을 놓은 채 살다 보니 어느새 학기는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하나를 배웠다. 무언가를 하든 일단 바쁘면 시간이 빨리 간다. 물론 좋은 쪽으로 바쁘지 않았던 것이 나의 문제라면 문제였겠지만. 여자친구도 생겼다. 우리 단대의 다른 과 신입생이었는데, 단대 건물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던 아이였다. 마주칠 때마다 늘 커다란 눈동자에 눈이 가곤 했는데, 정말로 눈이 맞아 버렸다.


공부라는 것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친구들은 모두 여자라든가, 혹은 스포츠, 아니면 게임 이야기 만을 했다. 나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친구들과 동화되었다. 이건 우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야. 친구들과 나는 그렇게 되뇌며 젊음을 탕진했다.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낭비라는 게 없는 인생이 과연 즐거울까를 생각해 본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특히 젊고도 젊은 삶에 낭만이라는 것 없이 무엇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낭비가 있어야 낭만이 있는 법 아니겠는가.


나의 자기 합리화는 1학년 생활과 함께 끝이 났다. 내 손에는 입영 통지서가 들려있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입대했다. 102 보충대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추위에 벌벌 떨며 훈련소를 마쳤다. 나는 연천으로 배치되었다. 생각보다 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빴다. 매우 나빴다. 그래도 어찌어찌해 냈다. 많이 힘들기는 했다. 군대에서 여자친구와 이별했다. 눈동자가 매우 반짝였던 그녀는 나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콜렉트콜 걸지 마. 어차피 안 받을 거니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그냥 문득문득 생각이 나다, 아 헤어졌지. 그러곤 그냥 약간 공허해지는 기분이 드는 정도였다. 이별 뭐 별거 없네. 내가 별로 안 좋아했다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후유증이라는 게 시차가 있다는 걸. 어떤 사람들은 헤어지고 1달 후, 아니 6개월 후, 혹은 1년 후에도 갑자기 찾아온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오히려 군인이었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군복과 함께하는 삶 덕분인지 생각보다는 빨리 폭풍이 지나갔으니까.


전역했다. 내가 벌써 스물두 살…. 곧 스물세 살이 되겠지. 세월이 참 빠르다. 내가 뭘 어쩌겠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무어라도 하려고 아등바등하는 수밖엔. 열심히 복학 준비를 했다. 군대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내가 이것도 했는데, 무얼 못하겠어?’ 하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열심히 복학 준비를 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중 연락을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 인호였다. 초등학생 시절 5학년과 6학년 동안 엄청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다. 녀석은 5학년 초에 우리 반으로 전학을 왔다.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엄청나게 웃긴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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