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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Dec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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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원탁의 기사단처럼 종이가방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가방 안에 도시락이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배가 더 고파졌다. 나리가 도시락을 꺼내기 시작했다. 총 3단으로 된 도시락이었는데, 1단에는 김밥, 2단에는 유부초밥, 3단에는 여러 가지 과일이 먹기 좋은 크기로 손질된 채 들어 있었다. 나리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녀의 볼은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싫어서인지, 아니면 기대가 되어서인지 부끄러워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나리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으로 가려졌던 음식들의 실물이 드러났다.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호열이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던 것 같다.


“먹자.”


나리가 입을 떼자마자 나와 호열이는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시락에는 종류가 많다. 우리 부모님 세대께서 사용하셨던 사각형의 양은 도시락, 아니면 유치원생 시절 나들이를 갈 때 어머니께서 싸주신 민트색 찬합 도시락, 혹은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고 야간 자율학습 때 먹으라고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조그마한 보온 도시락 등등. 디자인도 다양하고 홍보하는 기능도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나리는 그날 사각형 모양의 피크닉용 도시락을 들고 왔다. 정육면체처럼 생긴 도시락의 맨 위에 위치한 뚜껑을 제거하면, 한단 한단 음식이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형식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도시락에는 보온 기능이 빠져있었다는 점이다. 유부초밥을 입에 댄 순간 입술을 통해 차가운 한기가 전해졌다. 나는 재빨리 호열이를 쳐다보았다. 녀석도 입을 연 채로 그대로 굳어버린 듯했다.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고,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입에 넣었다. 입 속에서는 다를 수 있어. 마음속으로 되뇌며 유부를 씹었다. 입 속 가득 차가움이 퍼졌다. 꼬들꼬들함을 넘어선 밥알은 한 알 한 알 자기주장을 하며 입 속에서 흩날렸다.


“맛이 어때?”


유리가 물었다. 나리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차마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유부초밥을 맛있게 먹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답이 없자 나리도, 유리도 각자 유부초밥과 김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은 도시락의 밥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특히 나리의 얼굴은 화면이 멈춘 듯 경직되더니,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도 느껴지는 그녀의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은 그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 무언가라도 말을 해서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트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십 대 시절의 나는 그런 상황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숙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음식을 하나씩 젓가락에 들고는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쉭쉭 거리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고는.


당혹스러운 침묵은 끝없이 이어졌다. 마침내 내가 호수에서 눈을 돌려 나리를 살펴볼 용기를 쥐어짜 냈을 때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누가 어떤 행동을 하든 지금 이 상황을 끝내줄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리가 일어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나리의 얼굴을 쳐다보려 노력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감정을 읽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긴 머리카락 때문에 나는 그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정말 찰나와 같았다. 나리는 어디론가 뛰쳐나가버렸다. 유리는 곧이어 나리를 쫓아 자리를 떴다. 나와 호열이만이 돗자리 위에 남아 있었다. 여전히 바람은 쌩쌩 불었고, 신발이라는 두 개의 꼭짓점을 잃은 직사각형의 돗자리는 바람이 추는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나는 나리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확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나는 확인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신발을 집어드는 그 짧은 순간,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구슬 같은 눈동자와, 그 주변에 가득 고인 눈물, 그리고 볼만큼 빨개진 흰자위를.


잠시 후 유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우리에게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속도 없지. 그뿐만이 아니다. 자리를 정리하며 나는 보온 도시락을 사용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눈치 없이 말을 내뱉었고, 그 발언에 호열이와 유리는 동시에 나를 나무라듯 쳐다보기도 했다.


유리는 나리가 진정되면 함께 데리고 가겠다고 말했다. 호열이가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유리는 거절했다.


”나리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


아쉬웠지만 호열이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 둘은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열이는 호열이대로, 나는 나대로 무언가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뒤늦게 그때의 상황을 복기하며, ‘왜 그런 말을 했지?’ ‘왜 그때 위로해주지 못한 거지?’와 같은 후회의 늪에 빠져 있었고, 호열이는 호열이대로 유리와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어머, 일찍 왔네? “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놀란 듯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한숨을 한번 쉬었다. 머리를 문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벽에 붙여놓은 슬램덩크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거짓이 아니라고요.’


대사가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왜 그런 용기가 없었을까….


‘아, 몰라.’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그날의 일은 한 겨울날의 꿈처럼 잊혀 갔다. 1월이 2월이 되고, 우리의 선행학습도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와 호열이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함께 앉아 수업을 들었고, 나리와 유리도 옆 분단에서 수업을 들었다. 우리 넷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만을 가끔 나누었고, 나와 호열이는 옆 분단의 여자아이들보다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남주나 다른 남자 녀석들과만 어울렸다.


눈 깜빡하니 2월은 절반이 흘렀고, 밸런타인데이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일찍 이성에 눈을 뜬 몇몇 녀석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오기 며칠 전부터 누가 누구에게 초콜릿을 받을 것 같네 마네 하며 강의실의 온도를 뜨겁게 올리기 시작했다. 나 또한 물론 관심은 있었지만, 좁쌀만 한 내 자아 탓에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냥 초콜릿 이야기가 나오면 흘깃 나리 쪽을 쳐다보는 게 내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초콜릿?”


집에 가는 길에 호열이와 대화를 나눴다.


“나야 받을 생각도 안 해. 내가 오히려 줘야 하는 입장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주는 날 아냐?”


내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여자애가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을 때 이야기잖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녀석의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 나에게 출처를 알 수 없는 애잔함을 불러왔다. 하지만 친구에게 힘내랍시고 어설픈 위로를 건넬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나리는 너한테 줄걸.”


한동안 말없이 걷던 호열이가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초콜릿 말이야.”


내가 눈썹을 들어 올리자 호열이가 살짝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냐? 그날 도시락도 싸 왔는데, 초콜릿이야 당연히….”


호열이는 목소리 높이다, 내 표정을 보곤 말끝을 흐렸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내가 조용히 말했다.


“직접 만들어준 음식을 먹고 표정이 썩어버린 사람한테 초콜릿을 준다고? 정이나 떨어지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호열이는 내 말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리랑 아무 말도 안 했어? “


녀석은 나의 고개가 끄덕거리는 걸 보곤 당황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게 우리 잘못만은 아니야. 누가 그렇게 김밥이 차가운 줄 알았냐고. 그건 맛있는 척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어.”


녀석의 위로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고 네가 나리랑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게 놀라워.”


호열이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나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무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실제로 녀석의 말에 잘못된 점은 없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화르르 타오르다 이내 불길을 삼켜버리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 나리를 어떻게 생각해?”


“나리? 그냥…. 초등학교 때 짝꿍을 했던 여자아이지.”


”그게 다야…? 나리에 대한 감정이?”


내가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자, 녀석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마음을 네가 아직 모르겠다면 괜찮아.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확실히 하는 게 좋아. 말이든, 행동이든.”


나는 걸음을 멈추고 호열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진지했다. 잠시간의 대치 끝에 호열이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잖아.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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