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묘미
금요일 저녁, 전국 지도를 바닥에 펼치고 말한다.
“아들, 눈 감고 동전 던져봐”
아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뜬금없는 이벤트를 열었다.
동전이 떨어진 곳은 차로 왕복 8시간.
당일치기는 무리. 바로 숙소를 예약했다.
토요일 아침, 하루치 옷가지만 챙겨서 출발.
낯선 고속도로 위에서 낯선 여행에 기대반 걱정반, 이제야 스마트폰으로 근처 맛집을 알아본다. 광고인지 경험담인지 알 수 없는 무수한 게시글은 마치 모든 메뉴가 지역 맛집이라는 듯 화려하기만 하다.
‘그냥, 길 가다가 내키는 대로 먹지 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든다.
위로는 듬성듬성 뭉게구름 핀 짙푸른 하늘이,
사방 눈높이에는 하늘과 얼굴 맞대고 있는 녹음 짙은 산들이 선명하다.
낙동강의성휴게소에서 들러 낙동강을 찾아보려 잠시 헤맨 것만 빼고 무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울산 장생포.
장생포 고래문화특구에는 바다를 접하여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 울산함이 있고, 도로 맞은편으로는 가파른 언덕 오르막길을 따라 양옆에 송엽국, 수국으로 가득한 꽃밭이 펼쳐진다. 언덕에 올라 능선을 따라 잘 닦은 산책길을 잠시 걸으면 시끌벅적한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을 만날 수 있다.
오후 3시.
진품 뼈로만 전시한 고래박물관, 다양한 물고기가 있는 생태체험관을 둘러본 후 안내소 옆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한다.
행사 기간인지, 햄버거 세트를 주문하니 노란 고래 모양의 그립톡을 선물로 준다.
늘 그렇듯 가장 먼저 배를 채운 아이는 먼저 밖으로 나가고, 아내와 느긋하게 마저 먹는다.
안내소 쪽 매장 출구 앞에는 둥그런 석조 식수대가 있는데, 아이는 식수대 앞에 가만 서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아이가 수도꼭지 버튼을 누르고 있고, 위를 향해 힘없이 나오는 물줄기에 입을 대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누가 키우고 있는 걸까’
물 마시는 녀석을 아이는 계속 쓰다듬는다.
좋아하는 동물들을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이 동물농장 프로그램으로만 달래던 아이는 떨어질 줄 모른다. 관람시간이 늦어질까 보채니 야속하다는 듯 입만 삐죽 댄다. 다행히 고양이가 먼저, 높은 화단으로 뛰어올라 유유히 사라진다. 무념한 고양이는 제 갈 길 갔을 테지만, 터줏대감이 객 생각해 준 듯하여 실소한다.
오후 5시.
고래문화마을은 초입부터 번잡하다. 남녀노소 관람객은 저마다 흥이 난다. 약 40여 년 전 장생포 마을을 재현하였지만, 그 시절 추억은 어딜 가나 비슷할 테다. 당시 교복을 빌려 입고, 삐딱하게 사진도 찍고 고고장에서 춤도 춘다. 국민학교 운동장에는 말뚝박기 놀이를 하는 조형물이 있어 어른도 아이도 달려든다. 지금은 사라진, 아니 달라진 풍경들은 시끌벅적한 관람객과 함께, 당시 의상을 입고 상점 하나씩 꿰차고 주인행세하는 직원들 덕분에 살아 움직인다.
우리는 천천히, 꼼꼼히 둘러본 뒤 고래해체장 쪽으로 향했다. 고래착유장, 목수간을 지나자 좁은 길 양옆으로 우체국과 고래막집이 있다. 우체국 지붕 위에는 참새들 수십 마리가 안절부절 앉아 있다. 바닥에 떨어진 쌀알들을 먹으려 내려왔다가 아이들이 달려들어 도망갔다가, 다시 내려오니 남녀 일행이 지나가서 도망가고, 다시 아이들 달려오고, 그러다 사람 한적한 시간이 되어 이제야 한시름 덜고 편히 식사하려 했더니 비둘기 한 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횡포를 부려 다시 지붕 위 신세다.
고래막집은 가벼운 먹거리를 파는 식당으로 운영 중이었다. 흔치 않은 값싼 가격표에 놀라며 들어갔다. 이것저것 맛보고 싶은 욕심에 열무비빔밥, 옛날도시락, 옛날짜장면을 주문한다. 조금 전 들른 패스트푸드점보다 더 빨리 나온다.
기대감 듬뿍, 한 수저씩 맛을 본다.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성비 좋은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눈을 들어, 문밖 참새들의 곤경을 안타깝게 쳐다본다.
‘음, 맛은 그나마 옛날도시락이네’
황동색 직사각형 철제 도시락 안에 하얀 쌀밥이 넉넉히 들어차고 그 위에는 넓게 덮은 계란프라이가 있다. 도시락의 짧은 면 한쪽에는 잘게 썬 신김치, 볶은 멸치, 콩자반, 그리고 원반 모양의 큼지막한 옛날 소시지 3개가 나란히 들어차있다. 옛날짜장면은 면이 탱글 잘 익었지만 살짝 싱거운 짜장라면 맛이고, 열무비빔밥은 열무김치가 살짝 더 익은 듯 매콤 시큼한 맛이었다. 이만한 가성비에 양심이 찔려, 부푼 욕심을 넣어두고 묵묵히 옛날짜장면을 먹기로 한다.
미처 다 먹지 못하고 젓가락만 돌리던 차, 아이가 옛날도시락을 남기고 참새들을 향해 뛰쳐나간다.
어느새 내 오른손은 수저를 옮기고 있었다.
괜스레 참새들에게 미안해진다.
‘아이를 잡아와야 하나’
그때, 어린 딸과 함께 온 세 명의 가족이 바로 옆 테이블에 앉는다. 메뉴만 바라보며 고민하던 그들.
가만히 이쪽 테이블 음식들을 쳐다보다가, 사투리 섞인 말투로 묻는다.
“뭐가 나요?”
순간 전광석화처럼 내 입이 말한다.
“옛날 도시락이요”
그들은 거침없는 대답에 살짝 당황하고, 나도 놀라 주방을 바라본다.
“그래, 옛날도시락 맛있지.”
옛날도시락 하나와 소떡소떡을 시킨다.
사장님은 여전히 주방에서 주문받은 요리를 하느라 분주하다.
이후, 숙소에서는 끊임없이 오가는 배들로 잠들지 않는 장생포 바닷가를 내려다보았다.
다음날은 부둣가를 거닐며 장생포의 아침을 한차례 즐긴 후, 대왕암으로 향했다.
여행의 묘미가 생경한 만남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도를 펼치고 동전을 던져보는 것도 좋다.
분명 무의식이나마 추억이란 명작 한 점을 간직하게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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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프런트에서 왈,
“한주만 늦게 왔으면 사람들 꽉 차서 예약도, 오가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일주일 뒤, 2024 장생포 수국 페스티벌이 개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