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향연에 홀로 젖어들다
시에 흠뻑 젖어 뿌리 깊이 내린 삶들의 축제 속에
맑은 물 위에 떨어진 짙은 잉크 한 방울처럼 단말마의 흑빛 강렬히 뽐냈지만 이내 이지러져, 깊디깊은 희로애락의 시류에 잠식하여 잿빛 되고 만다.
시인들이 부드럽게 읊조린 미풍이 가슴 스칠수록
내 갈 길 고집스럽게 움켜쥐지만 내 짙은 개성 잃어가고 희미해질까 떨고만 있다.
아, 문장의 마술사들이여.
흩뿌려진 단어들을 빈틈없이 쌓아 올렸구나.
숙련된 미장이들이여, 숨구멍 하나쯤 남겨주지 않겠습니까.
수필가는 그동안 장광설 늘어놓은 죄가 부끄러워 움츠린다. 상징과 압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단어가 서로 고립되어 의미를 잃을까, 저 멀리 그에게 닿지 못할까 속앓이 할 뿐이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이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하고 남은 연탄재로 마음을 울린다면, 수필가는 불티가 튀어나간 방향과 끓어오른 대상을 노려보며 묘사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역설적으로 짧아지는 시간, 어찌 야속하지 않으랴. 아직은 문장마저 줄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아직은.
몽매한 수필가는 뻔뻔하게 자신을 항변하고 싶었으므로 시는 단지 이해가 아닌 느낌의 차원이라고 좌뇌에 새겨둔다.
무명의 수필가여.
도대체 왜 불안한 마음 안고 이 자리에 섰는가.
아침에 부랴부랴 서두르다 접촉사고를 일으키더니, 마치 소설처럼 장인어른마저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한 날. 이런 봉변에도 이끌려 온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명의 수필가여.
늘 그랬다. 이질감, 위화감을 회피하려 무던히 애썼다. 알 속에 꼼짝없이 웅크렸다.
이제 시로 깨어나고 피어나려고, 소설로 깨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일까. 나를 둘러싼 껍질을 다시 한 번쉼 없이 쪼아댄다. 질식하고 싶지 않다.
단지, 딱 한 번의 강한 부리질이 필요할 뿐.
그것은 ‘시’일까, ‘수필’일까, 아니면 ‘소설’일까.
구름 찢고 드러난 태양은 붉은 얼굴 환하게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