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사이 Nov 14. 2024

선택의 기로에서

멈춰 누울 것인가, 일어나 걸을 것인가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지/그런 거지’

탄식과 어울리면서도 자세한 설명 따위 필요 없이 어물쩍 넘어가기 좋은 문장이다. 또한, ‘에헴~’ 헛기침 내뱉으며 성인군자 행세하기 좋은 문장도 있다.

‘지나 보면, 아무 일도 아니더라’

자칫 내 입으로 내뱉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입술을 앙다문다. 간과하지 말지어다! 위의 문장들은 삶을 살아낸 사람들의 명예 훈장이요, 생의 자격을 얻은 자들의 여유에서 나온 자조적 덕담이다.


난 아직 멀었다.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선택지에 고통스럽다. 무엇을 골라야 할까. 지금 놓치면 다른 기회는 올까. 기회비용은 없는가. 온갖 계산에 머리만 복잡하다.

그간 여러 번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내가 찾아간 적도 있고, 갑자기 찾아온 적도 있다. 몇 번은 YES를, 몇 번은 NO를 불렀다. 다행히도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선택을 하고 나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다. 흔적에는 보통 아쉬움과 후회가 남기 때문이다. 선택 뒤에 기쁨과 만족이 있다면, 현재를 즐기며 앞을 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은 후회가 아니라 기회와 더 친하다고 믿는다.


자리를 잡은 후 찾아온 네 번째 ‘선택’.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내가 찾아간 선택이었고, 두 번째와 네 번째는 내게 찾아온 선택이었다. 찾아간 선택은 모두 착오로 판단하여 결국 NO를 불렀고, 두 번째 선택은 YES를 불렀지만 타인이 가로막았다. 의리를 외치며 가로막았다. 네 번째는 진행형이다.


선택은 늘 어렵다.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판돈이 너무 크다. 내 나름 ‘선택’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나를 위한 것인가

현재를 길게 그어 미래 시점에서의 ‘나‘와, 선택된 삶의 예측한 ’나‘를 비교해 본다. 가장 어려운 분석 작업이다.

2. 가족을 위한 것인가

선택에 따른 영향을 가족으로 확장한다. 혹여 지쳐 쓰러져 가족에게 염려를 끼칠 이유는 없다. 특히, 아내의 말은 중요하다. (선택의 무게를 덜기 위한 꼼수일지라도) 이야기 나눠야 한다. 내 주변에서 가장 현명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부쩍 큰 아이의 말도 들어야 할지 모르겠다.

3. 세상(인류)을 위한 것인가

선택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가. 조금이라도 세상이 나아지는 데 보탬이 된다면 선택하는 편이 낫다.

세 개의 답을 구하면서 동시에 과거의 선택 이력을 참조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떠한 결과로 이어졌는지 따져본다. 이러한 과정은 선택 앞에 선 ‘나’를 자세히 묘사한다. 나와 주위의 모든 관계 속에서 선택을 조망한다. 후회가 없다면 거짓이지만, 선택의 결과는 ‘대체로 만족’이다.


일단, 선택권을 허락해 준 상대방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멈춰 누울 것인가. 일어나 걸을 것인가 ‘로 치환해 본다. 나란 놈은 일어난다면 분명, 뛸 놈이다. 지쳐 쓰러진 적도 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어떡하지?????????’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해진다.

오늘도 무거워진 머리통을 매달고 걷는다. 두 다리를 바라본다. 늘어난 체중 탓에 무릎에 무리가지 않을까 우려스럽지만 다행히 건재하다. 느려졌을 뿐, 분명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

선택이 앞을 가리킨다면 옳지 않을까. 과정과 목적지는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멈춰 있을 바에야 다리는 무용지물이 아닌가.


이쯤에서 잠시 손가락을 멈춘다.

위에서부터 천천히, 한 문장씩 되새김질한다.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서의) 내 마음은 어디로 기울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조금은.

이제 선택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 걷기’ 옆에 ’ 쓰기‘도 슬며시 놓아둔다.

’ 어떡하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