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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Nov 06. 2024

아이들의 불씨를 지키는 어른의 다짐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중, <동욱>에서 한 문장을 길어 올리며

아이들의 그런 미성숙이, 순진이, 동심이 무서웠다 p183


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를 키우며, 때때로 예상과 다른 아이의 행동과 생각을 교정한다는 핑계로 힐난하고 질책한다. 그러면, 아이는 말대꾸를 하다가 곧 멈춘다. 몸도 크고 목소리도 큰 어른을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일 뿐, 양보에 가까운 침묵을 한다.


난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어린 시절은 희미하다. ‘나는 달랐을까? 지금 아이에게 꾸짖을 자격이 있을까? 무엇을 기준으로 아이의 삶을 재단하는가? 무엇을 기대하는가’ 다시 말해, 난 언제부터 어른 행세를 한 것일까?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군 제대한 후에? 회사에 들어가서?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낳고 나서? 시나브로 어른인 양 행동해 왔다. 돌이켜 보면, 나이가 들수록 교만과 고집을 숨긴 우스꽝스럽고 능청스러운 얼굴로 바뀌었다. 나보다 어린 세대가 늘어날수록 내가 세상에 조금 더 익숙하기 때문에 인도할 의무가 있다는 듯 그들 앞에서 설교를 늘어놓는다. 마치 세상이라는 무주물에 대해 엉덩이를 깔고 앉아 점유권을 행사하듯 거만하다.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마음에서 비롯된 불씨는 분노를 연료 삼아 서서히 밖으로 분출되며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번질 수 있다. 나이가 인내력과 꼭 비례하지는 않지만, 나이가 많다면 대체로, 누적된 경험이 행동의 결과를 미리 경고해 준다. 이것은 아이에 비해 조금 덜 감정적이라는 말일뿐, 임계점을 넘는다면 파괴력의 크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결국, 불씨가 커지기 전에 진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감정적일 수 있는 아이의 경우, 순간의 과오가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삶까지 태워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역시 어디까지나 ‘과오’ 일 때를 가정한다.


동욱은 그곳에 서 있다. 소방차를 부르고 불길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소방관이 본 동욱의 모습은 그뿐. 수영을 못 한다는 말을 못한 채 강에 뛰어들었다가 자신 대신 죽은 친구는 남편을 원망할까? 뒤늦게 강을 향해 미안하다고 울부짖어도 소용없다. 남은 인생을 친구의 몫까지 두 배 더 알차게 살아낸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동욱이 붙잡혔던 사건의 진실도, 남편이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동욱의 마음도, 친구의 마음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어렸다. 어리기에 뒷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어리다는 것이 통상 성숙하지 못하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우리는 동욱을 미성숙하며, 치기 어린 불장난꾼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아이 역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저마다의 사정 속에 사고하며 자기 책임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많은 시간 함께 하는 담임 선생님조차, 심지어 부모조차. 하물며, 타인은 오죽하겠는가?


‘아이들의 그런 미성숙, 순진함, 동심’은 어른들의 편의적이고 이기적인 몰이해다. 아이들은 다수의 어른들에게 말할 기회가 없을 뿐이다. 단지, 침묵했을 뿐이다. 아이들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다. 어른들의 광기 어린 교만을 잠재울 진정제일 뿐, 아이들의 진심은 가슴속 깊게 침잠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이 만든 올가미에 걸린 채 이끌려간다.


잊지 말자. 이미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나 역시 또 다른 어른들에게는 아이이며, 미성숙하고 순진한 세대일 뿐이다. 불장난이 잘못된 행위라는 것은 아이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을 냈다면 이유가 있다. 실수였거나, 차곡차곡 쌓인 분노의 분출이었거나. 미치지 않았다면, 어른이 불을 낼 수 있는 이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둠 속에 위아래로 흔들리는 담뱃불은 친구를 향한 우정의 향, 애도의 향이 될 수도 있지만, 의도치 않게 타인을 향한 지옥의 불길이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어른이라면 아이의 미성숙, 순진함, 동심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아이 내면의 불씨가 꺼질까 두려워해야 한다. 현실이 부조리하다면, 동시대의 어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요, 부질없으니 그대로 버티라고 세뇌한다면 그 책임은 아이에게 없다.


잊지 말자.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그들의 몫이다. 어른으로서 안전과 공감, 사랑에 대한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세상을 편향 없이 보여주면 충분하다. 불씨가 어디로 옮겨져 활활 타오를지는 아이의 고유한 선택권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동욱이들에게 남길 메시지는 ‘잘 견뎌라, 형편을 감안하여 형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상투적이고 불편한 인사말이 아니다. 세상을 원망하여 희망을 버리지 않길 바라며, ‘미안하다. 언젠가 네가 만날 세상을 따뜻하고 안전하게 만들어 줄게’라는 다짐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랜 시간 끝에 문을 열고 세상에 첫걸음을 내딛을 때, 어두운 부조리가 없는 밝고 포근한 세상을 준비하겠노라고 꾹꾹 눌러 담은 힘찬 메시지여야 한다.

또한, 어른들은 ’ 알았다 한들 무엇이 달라졌겠는가 ‘라는 푸념만 늘어놓지 말고 작은 손길이라도 내밀어 서로의 온기를 나누어야 한다. 아이의 손을 향해, 어른의 손을 향해. 인간은 기껏해야 한 세기도 살지 못한다.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돌아간다.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행운이자 축복이 아닌가.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서로 안아 주고 보듬기도 부족한 시간, 세상의 동욱이들에게 각자의 너그러운 불씨로 따뜻한 난로가 되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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