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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Oct 23. 2021

말 더듬이 남긴 모든 게 미운 건 아냐

03

오래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선명한 게 몇 가지 있다. 이를테면 12살 때 발표를 하는데 내 말 더듬에 누군가의 웃음이 터져버린 일. 그 웃음이 교실에 있던 모두에게 전염됐던 일. 이후 나는 발표를 필사적으로 피했다.


대학  발표자를 돌아가면서 정하는 팀플 수업에서  순서가 스킵되는 일이 있었다. 누군가 조장에게 “ 쟤는 발표  해요" 물었다. 조장은 내가 뒤에 있는  몰랐는지 “  더듬잖아"라고 했다. 발표를  해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고 있던 나는 마음이 무너졌다.


그런 기억들은 미운 버릇을 남겼다. 난 과도하게 남 눈치를 보거나 너무 쉽게 당황하곤 했다. 말 더듬에 대한 경계심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상대가 답답해하고 있지 않을까 눈치 봤고 누가 말 걸면 대답을 잘 못할까 봐 긴장하고 당황했다.


대학에서는 어릴 때 익숙했던 너그러움은 찾기 힘들었다. 말 더듬과 그로부터 파생된 단점들을 들키는 게 두려웠던 나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수업 끝나고 (예의상)한 잔 하자는 동기들에게 싫다고 했다. 엠티 인원을 취합하겠다고 연락한 과대에게 성가시다는 듯 굴었다. 누가 장난을 치면 정색하기도 했다. 내게 날아오는 말들에 저의가 있을 거라 넘겨짚기도 했다. 누구도 다가오지 말라는 듯이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나는 특출 나거나 매력적인 면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방어적으로 구는데 굳이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스레 주변인이 돼갔다.


같은 과 선배 B는 어딜 가도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B는 우리 과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선 어김없이 드립을 날렸다. 대부분 누군가를 놀리는 방식이었지만 한 번도 선을 넘지 않았다. 상대방이 인신공격으로 느끼거나 치부로 여기고 있을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놀렸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유머에도 수준이 있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다치게 함으로써 만들어내는 웃음은 일시적이고 불쾌한 것이지만 B는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당사자도 웃는 웃음을 불러낼 줄 알았다.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몰렸다.


나는 아웃사이더면서도 방어적인 사람이었기에 누구도 다가오거나 장난을 걸지 않았지만, B는 내게도  드립을 쳤다. 현란한 드리블 같은 드립이었다. 나는 그런 걸 어떻게 되받아쳐야 재밌는지도 몰랐다. 또 나쁜 버릇이 나왔다. 뻔하게 당황했고 재미없는 대답이나 던진 뒤 눈치를 봤다. 부끄럽지만 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아 다신 나한텐 장난 안 걸겠네… 아쉬움 섞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오히려 B의 농담은 나에게 집중적으로 향했다. 난 매번 당황했고 눈치를 봤다. 희한하게 B가 내게 치는 장난을 과 사람들이 좋아했다. 나를 중심으로 터지는 웃음이 늘어났다. B는 말했다. “보통 놀리면 받아치거나 무시하는데, 너는 되게 크게 당황해서 횡설수설하잖아. 그게 되게 재밌어. 놀릴 맛이 난달까”


그것도 놀리는 거냐 물었다. B는 나의 그런 모습이 상대로 하여금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잘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계산 없는 사람, 매사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처럼 보이거든. 어쨌거나 네 반응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난 그거 부럽던데.”


B의 말을 완벽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진심인 건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내 모습, 말 더듬으로 인해 생긴 내 모습의 어떤 부분은 상대를 편하게 만든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정말 기뻤다. 평생을 말 더듬 때문에 생긴 모든 걸 감추고 싶은 치부로 여겨왔다. 쉽게 요동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심호흡을 했다. 때론 퉁명스럽게 대했다. 벽을 쌓으면 내가 더 다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실은 그럴수록 외로웠다.


말 더듬이 남긴 어떤 것들은 이미 나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다치면서 생긴 흉터였지만 그게 꼭 나를 괴롭히는 단점으로만 남은 건 아니었다. B의 말처럼 오히려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늘 말 더듬의 모든 모습이 꼴도 보기 싫었는데 어떤 부분은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보듬어주도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인생의 무게가 한 움큼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학교에서 <굉장히 웃긴 사람>이 되어있었다. 옆과 애들이 "쟤가 그렇게 웃겨?"라고 물어봤다는 말까지 들었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더 웃기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물론 내가 웃기려고 작정하고 말할 때는 정적만이 흘렀지만......


대학 생활을 풍성하게 보냈다. 그리고 다시는 내 둘레에 벽을 치지 않았다.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이후 내 삶은 다 비슷한 방식으로 흘러갔다. 어떤 조직에 가도 B 같은 사람이 항상 먼저 다가와주었고 친구가 되어줬다.


B가 아니었다면 난 인터뷰도 글쓰기도 시작하지 못했을 거고 지금보다 훨씬 흐린 삶을 살았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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