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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두부 Oct 23. 2021

리스너는 말을 더듬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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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더듬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지만 무조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특정 발음을 할 때다. 나는 기역(ㄱ)이나 키읔(ㅋ)으로 시작되는 말을 할 때 예외 없이 말을 더듬는다. 입을 떼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그래서 상대가 김 씨, 권 씨, 강 씨면 속으로 탄식한다. 이름이 ㄱ으로 시작해도 마찬가지다. 건희라던가(친구 중에 있다) 규민(회사 동료 중에 있다) 이라던가 하면 막막한 기분이 든다. 당사자는 어처구니없겠지만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상황이 안 왔으면 하고 속으로 빈다. 웃긴 소리지만 내게 우리나라에 김 씨가 가장 많은 건 비극이다.


고유명사가 아닐 때는 그나마 괜찮다. 나는 ㄱ이나 ㅋ으로 시작하는 명사를 만나면 그 찰나에 대체할 이름을 머릿속에서 찾는다. 카센터는 발음하기 어려우니 차량 정비소라고 바꿔 부르는 식이다. 이런 화법은 종종 상대의 의아한 표정을 불렀지만 나는 말 더듬을 멈추는 게 우선이었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불필요한 공정은 정작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게 했다. 내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ㄱ이나 ㅋ을 만나면 ㄱ이나 ㅋ이 아닌 다른 단어를 찾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고 그 사이 논리나 적절한 표현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말을 시작하기 전 내 머릿속에선 완전한 형태로 저장되어 있던 문장도 순식간에 해체되고 본연의 역할을 잊어버렸다. 소통의 차원이 조금만 높아져도, 논리가 조금만 복잡해져도 대화가 잘 안 됐다. 사람들과 친분을 형성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멍청이가 된 기분이 쌓였다.


사람은 나이를 먹고 경험을 쌓아가면서 어떤 현상이나 문제의 본질을 짚는 법을 배운다. 나는 죽도록 비본질만 붙잡는 인간이 되어갔다. A와 B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논의를 하는데도 나는 그저 말 더듬 없이 대화를 끝내는 것 만이 목적이었다. 그렇게 계속 헤매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취업 시장에서는 날마다 더 복잡한 현상을 이해하라고 의견도 내라고 버겁게 들이밀었다.


꼭 말로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어도 그랬다. 실기 평가에서도 에세이 과제를 써냈을 때도 좋은 점수를 못 받았다. 내 생각이 어딘가 어긋나 휘청이고 있다는 실감을 받았고 말더듬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말 더듬만 고치면 나도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말을 안 더듬게 되더라도 문제는 여전할 거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느는 건 임기응변뿐이었다. 다른 단어로 말하거나 발표를 피하거나 무작정 외운 문장을 시험에 그대로 쓴다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된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대처일 뿐이었다. 수업에서 팀플에서 회의에서 밑천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쉽게 드러나곤 했다.


막막함은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극대화됐다. 자기소개서에 쓸 말이 전혀 없었다. 컴활 1급과 토익 점수가 있었지만 가치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소서에는 살아온 경험에 강점을 적절히 섞어내야 한다는데 나는 헛다리만 짚고 살아왔지 않은가. 본격적으로 레이스를 시작해야 할 시점인데 출발점에 누가 내 발을 묶어둔 것 같았다.


딱 하나 자신 있었던 건 남의 얘기를 듣는 거였다. 능력이라기보단 말을 더듬으니 어쩔 수 없이 그거라도 잘하는 거였다. 어딜 가도 내가 분위기를 주도하는 건 불가능했다. 타인을 주연으로 만든 뒤(내가 만든 것도 아니지만) 잠자코 듣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어리숙함이 허점을 많이 노출시켜 말하는 상대를 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덕에 상대는 가장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내보이곤 했다. 그런 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내가 덕 보는 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어른들은 그렇게 경계가 없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순간이 온다고 했다. 사기당하기 딱 좋은 스타일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듣는 포지션에 있으면, 상대는 내가 말을 더듬든 말든 상관 안 했다. 어쩌면 상대는 언제나 내 말 더듬을 크게 상관 안 했지만(관심 없었지만) 나는 리스너가 되었을 때만 그 사실이 보였는지도 모른다. 


리스너도 말은 한다. 되물어야 하고 상대의 말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할 수도 있어야 하니까. 그게 대화니까. 당연히 말 더듬은 계속 튀어나왔겠지만 상대의 표정에서 “아, 내가 이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고 있구나”라고 느낀 적은 없었다. 평생 그런 기분을 느껴왔음에도 듣는 그 순간만은 평화로웠다.


듣다 보면 종종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마주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쉽게 감화됐다. 기쁜 이야기든 슬픈 이야기든 조금만 극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감동받거나 마음 아파했다. 한 때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보고 드라마 PD를 꿈꾸기도 했다. 좋은 이야기를 멋지게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는 사람. 드라마 PD가 되려면 현빈처럼 똑똑하고 말을 잘해야 했기에 그 꿈을 이룰 가망은 없었지만 말이다.


대학교 4학년 여름 페이스북에서 길거리 인터뷰어를 뽑는다는 글을 봤다. 길거리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의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써내는 당시 팔로워 6만 명 정도의 프로젝트 팀이었다. 모집 요건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던 것 같다. "편견 없이 남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요건에 <적재적소에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을 찾습니다> 라던지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같은 말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거다. 길거리 인터뷰라니 말만 들어도 손에 땀이 나는 일이다. 하지만 <남의 말만 잘 들어주면 된다>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말 더듬이와는 가장 멀어 보이는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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