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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Mar 14. 2022

3월 14일 월요일

비가 그치고 나면 진짜 봄이 올 것 같다!

1. 오히려 좋아

단 한 번도 마음 깊이 공감하지 못한 말이었다. 오히려 좋아라는 말. 엎친 데 덮친 격인 상황에서 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고 있길래 아니 얼마나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으면 저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오히려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


거의 한 달이 넘도록 못 갔던 부모님 댁에 주말 아침 부랴부랴 내려갔다. 점심도 먹고 수다도 떨고 엄마 심부름도 해가면서 오후를 보냈다. 미세먼지가 많았지만 마스크 시대에 딱히 무서울 게 없어 1시간 반이 넘는 산책도 했다. 저녁도 먹었고 위기가 있었지만 우선은 모면했다. 그리고 일요일. 남편과 아침에 토스트를 해 먹고 오랜만에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마셨다. 비가 와서 창문을 한참 열어뒀고 그 사이 그쳤기에 3-4년간 매번 말만 하던 새 안경도 맞췄다. 집에 와서 낮잠도 자고 늦은 저녁도 해 먹고 주말을 충만히 보내고 나니 오히려 좋아의 마음이 되었다.


딱히 오히려 좋다는 말을 하는 순간들이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2. 비

겨우내 너무 추웠다. 눈도 많이 왔고, 이제는 비도 많이 온다. 다행히 어느샌가 영하의 날씨는 돌아오지 않고 조금씩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며 슬그머니 봄이 오는 것 같길래 부랴부랴 공기청정기와 에어 드레서 필터를 주문해 갈아 끼웠다. 미세먼지 다음은 꽃가루와 황사 그리고 온갖 먼지들일 테니까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한다.


비가 내리고 나니 약간 쌀쌀하지만 이제  순서대로 초봄이 오는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주엔 갑자기 봄의 한복판인  같아서  정신을 못 차렸는데 이제 이렇게 차근차근 봄에서 여름으로 가려나보다.


3. 꿈

종종 말도  되는 개꿈을 꾸는데 그게 바로 어제였다. 작년 5월에 퇴직금으로 계약한  차가 이제 출고가 임박한 데다 같은 차를 계약한 사무실 동료가 얼마 전 차를 받았다기에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있는 참이었다.


구축 아파트의 가장 큰 문제인 주차난 탓인지 어제 꿈에는 여기저기 주차선을 물고 서있는 우리 집 하얀색 2007년형 아반떼 안에 나는 앉아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차문을 모두 잠그지 않은 상황이었고 어디서 등장한(기생충 지하실의 남자 같은)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문을 벌컥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놀랐고 꿈인 줄 알았지만 반대편 문으로 내렸다. 꿈에서 달리면 너무 온몸이 아프니까 달리진 않고 빠르게 잰걸음으로 주차장을 벗어났다. 개꿈.


4. 할머니

살면서 경험한 가장 지독한 가부장제와 지독한 유교의 집합체인 나의 친가 그러니까 아빠의 본가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데, 그 지독함이 어느 정도냐하면 세배를 해도 아들은 1만 원을 딸은 1천 원에서 3천 원을 겨우 주고, 아들의 이름은 정확히 불러도 딸의 이름은 그 집 모두를 통칭하는 대명사처럼 불리는 곳이었다. 산골에 있는 집이라 할머니 할아버지가 묵으셨던 1-2평짜리 아랫목 방 한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썰렁했다. 건넛방은 아궁이를 땐 곳만 거의 지옥불 수준으로 뜨거웠다. 영화 ‘우리 집’의 시골집 같은 풍경.


그 집에서 우리 아빠는 5번. 위로 형이 3명에 누나가 1명. 아래로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1명씩인 7남매였다. 가족이 많은 집이라 어른도 아이도 많았다. 어렸을 땐 내 이름의 가운데 글자를 똑같이 쓰는 돌림자가 주는 묘한 기운에 나보다 10살이나 더 많은 언니들을 쫓아다니며 친한 척 굴기도 했다.


큰 집 언니들은 나를 데리고 근처 개울가에 나가 담배를 피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술도 마시곤 했다. 물론 난 그냥 깍두기처럼 같이 있기만 했지만. 언니들은 언제나 할머니를 싫어했고 할아버지를 무서워했다. 아마도 한 집에 살면서 볼꼴 못 볼꼴을 다 봤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빠의 가족들은 모두가 지리산 근처에 터를 잡고 살았지만 우리 가족만은 유일하게 서울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 년에 딱 3번만 시골에 갔다. 설, 여름휴가, 추석. 그때마다 한 뼘만치 아주 작은 아랫목에서 잘 수 있는 특혜를 얻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 남동생. 그 따뜻한 아랫목에서 겨우 몸을 포개어 자다가 제사상이 들어오는 새벽 4시면 엄마는 어느샌가 부엌에서 아궁이 곁을 지키고 있었고 나는 지독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는 건넛방에 넘어가기도 했다. 제사상을 차린 딸과 며느리는 제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건넛방으로 넘어왔다. 제사가 모두 끝날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문을 열 수 없었다. 그저 기다려야 했다. 아랫목은 아들 몫 부엌과 건넛방은 딸 몫이었던 집.


시골과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이게 전부인데 얼마 전 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요양원에서 손 쓸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고 아마 오늘 밤을 못 넘길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어느덧 3일이 지났고 여전히 할머니는 차도가 없지만 그 사이 여러 가지 준비를 마치고 부모님은 다시 집으로 올라오셨다.


얼마 전 할머니를 잃고 엉엉 울던 남편은 나에게 할머니와의 추억은 없느냐 물었다. 나는 곧장 없다고 답했다. 그저 할머니는 늘 고쟁이에서 쌈짓돈을 꺼내어 나보다 4살이나 어린 남동생에게 만원씩 쥐어주면서도 나에게는 누가 봐도 잔돈인 꼬깃꼬깃한 천 원을 겨우 쥐어주곤 했으니까. 내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 우리 엄마와 때로는 우리 아빠를 부르는 이름이었으니까. 그 정도의 추억뿐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이제 산기슭에서 오는 스산한 바람에 산짐승 소리가 섞여 들리던 그 시골집은 영영 갈 일이 없겠구나 정도의 추억뿐. 하지만 아빠는 얼마나 슬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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