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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pr 19. 2022

4월 18일 월요일

꽃가루가 나리기 시작한 월요일의 일기

1. 봄

만연한 봄. 벚꽃이 지자마자 라일락이 곧이어 피는 이상한 봄이 오고야 말았다. 어느 순간 차창 밖에 노란 꽃가루가 내려앉고 눈코입귀 어디도 편한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온 몸으로 봄을 맞이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제는 처음으로 반팔을 꺼내 입고 출근했다. 물론 쌀쌀했지만 한낮 짧은 산책에는 제격이었다. 4월 중순이나 되어버렸다니 어쩐지 마음이 좀 쓸쓸하지만 여름밤 시원한 밤공기도 내심 기대된다. 겨울이 조금 길었던 것 같아.


2. 노을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딱 맞게 요즘 회사일은 일 넘어 일이다. 매일 아침 오늘 해야 할 일을 꼼꼼히 적어두어도 그 일들을 결국 미루고 미루다 금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모두 할 수 있는 상황. 아주 작은 일 100개와 때때로 큰 일 1-2개가 동시에 나를 찾아올 때면 정말 손을 놔버리고 싶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가장 바쁘다는 피크 시기를 지나면서 노을을 붙잡고 겨우 퇴근한다. 눈치 없이 얼마나 예쁘던지. 미세먼지가 많아 노을이 예쁜 것도 한 몫하고. 한강에서 여유로이 자전거나 타면서 보면 좋으련만 이 짧은 계절의 좋은 순간이 이렇게 지나가는 게 조금 아쉽다.


3. 아빠와 나

아빠와 나의 사이는 한 마디로 ‘서먹서먹’했는데, 그 사이가 10대부터 시작되어 결혼을 하던 29살까지 이어졌다. 아빠는 늘 바빴고 해외출장도 자주 다녔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 아빠가 사다 주는 디즈니 퍼즐이나 장난감 선물에서 아빠의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아주 어렸을 때 아빠와 나이 터울이 꽤 큰 형님, 그러니까 나의 왕 큰아빠가 돌아가셨는데 그 시절 아빠는 열흘 그리고 그다음 또 한 번의 열흘짜리 출장 중이었다. 이십여 일을 지내고 아빠가 돌아왔을 때 장례는 모두 끝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아빠는 출장을 갔다. 장례를 마치고 엄마가 보자기에 잘 싸서 장롱에 넣어두었던 장례 목돈이 도둑맞았던 때도, 그러니까 아빠가 일본 출장에서 사다준 마이마이와 일본 기모노 인형도 함께 도둑맞았던 내 생일에도 아빠는 없었다.


내가 미국 유학을 하던 10년 전쯤 아빠는 또 출장 중이었는데, 아마 우리가 ‘서먹서먹’ 하지 않은 부녀 사이었더라면 비행기로 2-3시간이면 만날 수 있던 거리였지만 아빠는 떡국과 쌀국수 택배만 잔뜩 부치고는 한국에 돌아갔다. 서운하진 않았다. 떡국과 쌀국수를 하나도 남김없이 끝까지 먹고 한국에 잘 들어와 같은 집에서 다시 복작거리며 살면 그만이었으니까.


20대 내내 중국과 미국과 홍콩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공부하던 일하던 시절에도 엄마는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늘 나를 보러 왔는데 아빠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 가까이 있었음에도 전화 한 번 아빠의 의지대로 한 적이 없어서 20대 땐 뭐랄까 아빠가 정말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무관심했던 게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사이의 어떤 변곡점은 29살에 결혼을 하면서부터였던  다. 나는 나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각자의 삶 속의 작은 순간을 서로에게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는 시댁의 소식을 전했고 아빠는 종종 아무 이유 없는 안부를 물어오곤 했다. 주로 남편에 대한 궁금증이나 내 새로운 직장에 관한 질문들이 주를 이루긴 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짧은 통화를 하고 나면 어쩐지 신나고 즐거웠다.


본가에 내려갈 때마다 아빠는 조금 더 있다가 가라며 우리가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방에 보일러를 넣어두고 기다린다. 하룻밤을 묵어가지 않겠다 선언하는 날은 누가 봐도 서운하다는 눈빛과 풀 죽은 표정으로 홀로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 모습이 어떤 날은 얄밉고 어느 날은 반갑다.


결혼 6년 차. 이제야 조금 친해진 아빠와 나는 각자의 생일 케이크에 꽂힌 초를 서로 불겠다고 입술을 쭉 빼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함께 깔깔거리기도 한다. 내가 조금 더 어렸을 때 이런 순간들을 함께 즐겼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가도 이제라도 이런 우스꽝스러운 추억들이 생기게 되어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내년 내 생일엔 초를 30개 넘게 꽂고 아빠랑 사이좋게 불어야겠다. 그럼 또 이내 질려 또다른 장난스런 추억을 만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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