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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26. 2022

9월 26일 월요일

임산부 좌석은 도대체 언제쯤 양보받을 수 있나요?

1. 병원 진료

반차와 반반차를 쪼개고 쪼개어 쓰다 얼마 전부터 태아검진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병원까지 오가는 길 내내 임산부 좌석이 비어있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다. 임산부 뱃지도 찼고 배도 어느 정도 나와있어 임산부 좌석 바로 앞에 서 있었는데. 남자거나 여자 거나 나이가 있거나 없거나 어떤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물같이 잡아둔 병원 예약이어서 2분 남짓 진료를 보고 나를 몇 주간 괴롭히는 비염과 이명 증상을 토로했다. 비염은 알레르기 비염일 가능성이 크니 약을 처방해주셨다. 마침내 공식적으로 의학적으로 지르텍을 먹는다. 오래 참았다 나. 미안 아가.


이명은 임신성 00으로 분류되는 임신 후 생기는 여러 증상 중 하나라고 하셨다. 임신성 이명이라니. 심박 소리가 귀에 울리고 어떨 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인데. 출산을 하면 나아지나요? 하고 여쭈니 맞다고 하셨다. 그럼 그전까지 제 몸은 그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임신성 00으로 분류되어 아픈 거군요. 네. 그래도 아가 너만 건강하면 99%의 나는 만족이다. 1%는 어떻게든 달래 볼게. 스스로.


2. 낮잠

올여름은 주말 내내 낮잠을 즐겼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30년이 넘도록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린이 시절을 제외하면 낮잠보다는 차라리 있는 체력 없는 체력 다 긁어모아 하루를 알차게 쓰는 쪽에 속하는 편이었던 나에게 낮잠은 조금 생소한 시간이긴 했다. 그러기엔 올해 나의 낮잠의 질과 만족도는 얼마나 높은지.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 도착하자마자 저녁엔 전복 한 상으로 혼쭐나고 다음날 아침엔 7시부터 산책을 나간 엄마 손에 들려온 맥모닝으로 혼쭐나느라 배부르고 피곤했다. 남편과 집에 오자마자 햇살 아래 꿀 같은 낮잠을 잤다. 그동안 낮잠 없는 삶 어떻게 살아온 거야. 주말의 특권인데.


3. 가을

가을이라 아침부터 막히는 길을 뚫고 오랜만에 자하 손만두에 다녀왔다. 임산부 핸디캡을 들이밀어 좌식에서 테이블석으로 옮긴 것부터 신의 한 수. 날씨가 좋아도 너무 좋아서 부암동이 깨끗하게 모두 내려다 보였다. 만두전골에 빈대떡까지 먹고 운 좋게 주차도 하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연달아 걸었다. 하늘도 높고 바람도 차지만 햇살 아래 걷기엔 아직 조금 더운 초가을.


잘 먹고 잘 걷고 주말 시작부터 알차게 놀고 나니 어쩐지 월요일이 조금 가뿐한 것 같은 기분. 병원 진료까지 보고 점심에야 들어가는 내 마음만 그저 가뿐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늘이 높고 푸를수록 저녁 즈음 노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해가 빨리 지는 건 너무 아쉽지만 퇴근길 노을을 쫓아 집에 오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오렌지 빛으로 시작해 결국 분홍색으로 물드는 하늘. 가을은  짧아서 아름다워.


4. 일에 대한 또 다른 단상

얼마 전 3번째 팀장님을 맞이했다. 첫 여자 팀장님. 워낙 호탕하시고 리더십 있으시다고 들었어서 기대하긴 했는데 지난 한 달간 나를 괴롭히던 일에서 드디어 한 발자국 나갈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려주시는 모습에 반했다. 물론 이제 갈 길이 구만리이지만 어쨌거나 주저하지 않고 첫 삽을 퍼주신 것에 대한 엄청난 감사함이 몰려왔다. 책임져주려는 선배도 사수도 팀장도 없는 집단에서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뭐. 이제 남은 건 내가 다 헤쳐나가더라도 그래도.


따르고 싶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딱 한 명만 있어도 그 힘으로 버티는 게 회사생활인데 드디어 생긴 걸까 그런 존재. 일이 너무 많고 힘들어 오늘도 오후 내내 숨이 탁탁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어디선가는 해결과 종착지로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하루.


이제 앞으로 15번의 월요일을 지나면 휴직에 들어간다. 그 사이사이 촘촘하게 계획된 학기 일정이 있지만 이제 꽤 일이 손에 익숙해졌고 크고 작은 위기 상황도 처리할 수 있게 되니 그 안에서 나름의 재미를 찾고 있다. 사무실을 옮기고 내 맘 같지 않은 사람 10명과 함께 있다가 그 반의 반의 사람만 만나면 되니 마음의 평화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사실 회사일이라는 게 이 정도의 보람과 이 정도의 스트레스라면 버틸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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